지난달 30일 정상영 KCC 명예회장이 숙환으로 별세했다. 세상은 ‘현대가(家) 창업 1세대’ 마지막 어른의 치열했던 84년 노정, 산업보국 열정 등을 앞다퉈 평가했다. 작은아버지와 작은할아버지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려는 정몽준 아산재단 이사장,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 등 가문 인사들이 일찌감치 빈소를 찾았고 정·재계 유력인사의 발길도 이어졌다.
서울아산병원에서 가장 큰 장례식장 11호실. 취재를 종합하면, 유족과 조문객만 입장이 허락된 2층 빈소 안에선 영화 같은 장면이 이어졌다. 정 명예회장의 아들 삼형제 중 둘째 정몽익(59) KCC글라스 회장(이하 정 회장)의 불륜, 중혼 등으로 얼룩진 가정사 때문이다. 장례 첫날인 1일, 정 회장과 ‘중혼적 사실혼 관계에 있는 배우자’인 A(43)씨가 빈소에 등장했다. A씨는 상복을 입고 있었다. 정 회장 모친과 형 정몽진(61) KCC 회장의 부인이 A씨를 다른 유족에게 소개했다.
A씨가 현대가 행사에 참석한 것은 이번이 두 번째다. 정 회장과 2006년부터 교제를 시작한 A씨는 작년 7월 정기선 현대중공업 부사장(정몽준 이사장 장남) 결혼식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당시엔 한복 차림의 가족들과 달리 일상복을 입고 참석했다. A씨는 정몽익 회장과 2015년 양가 부모 등 직계 가족이 참석한 가운데 결혼식을 올렸다. 이날 결혼식 참석을 계기로 가문 전체 차원에서 정식부부로 인정받으려 했던 것으로 해석된다. 그간 현대가 사람들은 정 회장 가정사에 쉬쉬했다. 하지만 빈소에서 마주한 생경한 상황에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20대로 장성한 정 회장의 적자 3남매는 A씨가 유족들에게 소개되는 광경을 묵묵히 지켜봤다고 한 참석자는 전했다. 본처 최모(58)씨는 빈소에 참석하지 않았다.
◆‘현대가(家) 축출이혼’ 사건
“상고를 기각합니다.”
2016년 12월15일, 대법원 2부는 정몽익 회장(당시 사장)이 아내 최씨를 상대로 낸 이혼청구소송에서 원고 패소로 판결한 원심을 확정했다. 심리 불속행 기각이었다. 상고 이유나 상고 사유가 적합하지 않아 본안 심리도 필요하지 않다고 대법관 네 명이 의견을 같이 했다. 2013년 5월 시작된 ‘1차 이혼소송’은 그렇게 3년여 만에 끝났다. 그러자 정 회장은 2019년 9월 다시 이혼을 청구하는 ‘2차 소송’을 제기했다.
우리 대법원은 이혼 소송에서 ‘유책주의’를 유지하고 있다. 바람을 피우는 등 결혼생활 파탄에 주된 책임이 있는 배우자는 원칙적으로 이혼청구를 할 수 없다는 원칙이다. 정 회장이 이혼 소송에서 패소한 이유다.
범현대·롯데가 혼맥으로 관심을 끌었던 정 회장과 최씨의 31년 혼인생활은 어떻게 파탄이 났을까. 유일하게 본안을 따진 1차 소송 1·2심 판결문과 취재를 종합하면, 이번 케이스는 범현대가에서 벌어진 ‘축출이혼’(무책배우자를 쫓아내는 이혼)이라는 평가가 가능하다. 책임이 없는 배우자가 지키려 했던 가정이 남편 측의 압박에 파탄에 이르는 과정이 판결문에 담겨 있다.
세계일보가 입수한 판결문에 따르면 최씨는 2012년 5월과 8월 극단적인 선택을 시도하면서 도합 세 차례 서울아산병원에 실려갔다. 그해 1월 정 회장이 가출한 직후다. 정 회장은 이 사례 등을 이유로 들면서 이듬해인 2013년 이혼청구소송을 제기했다. 정 회장은 “최씨의 불치의 우울증, 수차례 극단적 선택 시도 등의 사유로 이미 부부로서 애정과 신뢰를 상실했다. 부부관계가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파탄했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1·2심 법원은 “우울증 발병 등은 별거 이후에 비로소 발현됐다”면서 “별거 이전에 최씨에게 특별히 정신적 문제가 있다거나 치료를 받은 전력이 없다”고 일축했다.
정 회장은 이 밖에 최씨의 △피고의 독단적이고 폐쇄적인 생활방식, 인격 모독성 발언으로 인한 정신적 학대, 지나친 사치와 쇼핑 중독증 △시댁에 대한 패륜적인 언어폭력, 별거 △13년에 걸친 이혼 요구 △게으르고 편벽된 성격장애 증세 등을 이혼청구 이유로 주장했다. 이에 최씨는 “행복한 가정을 회복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포기한 적 없다”며 원고 측 주장을 반박한 것으로 알려졌다. 최씨가 제출한 증거에는 남편의 외도 사실을 모른 채 일상적인 부부처럼 지낸 사실을 확인하는 내용도 포함됐다. 재판부는 정 회장의 주장을 입증할 증거, 자료가 없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파탄에 이르렀다 하더라도 그 주된 책임은 일방적으로 별거를 한 원고에 있다. 유책배우자인 원고는 그 파탄을 사유로 이혼을 청구할 수 없다”고 판결했다.
◆정 회장, 항소심에선 파탄주의 주장
1심 패소 이후 정 회장은 항소심 전략을 전면 수정한다. ‘유책 배우자=최씨’란 프레임을 버리고 ‘혼인=파탄상태’임을 주장하는 데 집중했다. 그러면서 법정에서 A씨와의 관계를 전격적으로 공개했다. 자신은 △이미 2006년부터 A씨와 교제를 시작했고 △2007·2011년생 두 아들(혼외자)을 뒀으며 △2012년 1월 최씨와 별거 직후 A씨, 아이들과 동거했고 △2015년 12월 양가 부모가 참석한 가운데 결혼식을 올렸다고 밝힌 것이다.
2심 재판부는 원심과 달리 혼인 상태에 대해 “2012년 원고의 가출 이후 그 실체가 완전히 형해화돼 파탄에 이르렀다”고 인정했다. 그러면서 재판부는 ‘파탄의 책임’에 있어 “일방적으로 별거를 시작하고 성명불상자와 부정행위를 넘어 중혼관계를 유지한 원고의 잘못”이라며 “원고의 청구는 모두 이유 없어 기각한다”고 판결했다. 특히 재판부는 “최씨가 정 회장과 성명불상자의 관계를 비교적 최근에 알게 됐다. 현재에도 최씨의 심적 고통이 상당할 것으로 보인다”고 지적했다. 최씨는 항소심 법정에서 정 회장의 부정을 처음 알게 된 것으로 알려졌다.
정 회장이 대법원에서 이혼 패소 판결이 확정된 이후 또다시 이혼 소송을 제기하자 최씨는 지난달 정 회장에게 이혼을 청구하는 반소(맞소송)를 냈다. 최씨가 8년 만에 정 회장의 이혼 청구를 수용하기로 마음을 바꾼 이유는 확인되지 않았다.
특별기획취재팀=조현일·박현준·김청윤 기자 conan@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