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형전투기(KF-X) 공동개발국 인도네시아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경제난을 이유로 개발 분담금을 수천억원이나 미납한 인도네시아는 최근 고가의 무기인 프랑스 라팔, 미국 F-15EX 전투기 구매 의사를 공공연히 드러내고 있다.
일각에서는 인도네시아를 배제하자는 주장도 나오지만, 동남아 방산시장 상실과 공군 부담 증가 등 예상되는 부작용도 만만치 않다.
◆라팔·F-15EX 산다는 인니, 정말일까
파자르 프라세티오 인도네시아 공군참모총장은 19일 “단계적으로 도입할 무기 중에는 F-15EX, 라팔, 공중조기경보통제기, A330 MRTT 급유기, C-130J 수송기, 중고도 장거리무인기(MUAV) 등이 있다”며 대대적인 전력증강을 시사했다.
인도네시아는 2021~2024년 미국 보잉 F-15EX 전투기 8대, 프랑스 닷소 라팔 전투기 36대를 구매할 계획이다.
최근 시험비행이 이뤄진 F-15EX는 미 공군이 144대를 도입할 예정으로, F-15 계열 전투기 중 최첨단 기종이다. F-22나 F-35 전투기보다 스텔스 성능은 낮지만 공대공미사일 12발과 벙커버스터 폭탄을 장착하는 등 무장탑재능력이 뛰어나다.
미국산 무기의 대외군사판매(FMS)를 맡는 미 국방안보협력국(DSCA) 홈페이지에서 F-15EX의 인도네시아 판매 관련 언급이 없다. 현 상황에서 인도네시아의 F-15EX 도입 발표는 ‘희망 사항’에 가깝다는 관측이 많은 이유다.
라팔은 프라보워 수비안토 국방부 장관 취임 이후 구매설이 끊이지 않았다.
닷소는 2030년대 초·중반에야 완전한 전투력 발휘가 가능한 KF-X보다 훨씬 빠른 2020년대 초·중반에 미티어, 스칼프 등 장거리 전략 타격 능력을 지닌 라팔 최신형 기체를 인도네시아에 제공할 능력을 갖췄다.
방산업계 관계자는 “닷소는 라팔을 1년에 50대 정도 만들 수 있다. 주문을 받으면 빠른 속도로 생산이 가능하다”며 “조기 전력화는 방위산업의 최신 글로벌 트렌드”라고 전했다.
지난해 8월 플로랑스 파를리 프랑스 국방부 장관과 관련 의향서(LOI)를 체결한 수비안토 장관은 라팔 외에도 스콜펜급 잠수함, 라파예트급 프리깃함 도입에 관심을 보이는 것으로 알려졌다.
프랑스 측도 이달 초 닷소 부사장급 인사들이 자카르타를 방문, 라팔 계약을 논의하는 등 적극적인 태도다.
프랑스 정부와 닷소는 금융지원과 절충교역, 기술이전 확대 등 다양한 옵션을 제시하며 인도네시아와의 대규모 방산 패키지 거래를 성사시키려 하고 있다. 이르면 4~5월쯤 계약이 이뤄질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하지만 인도네시아-프랑스 방산 거래가 이뤄질지, 인도네시아가 프랑스 대신 KF-X 공동개발에 적극 나설지 여부는 미지수다.
“정치적 이해관계가 매우 복잡하게 얽혀있어 의사결정이 언제든 뒤집힐 수 있다”고 현지 사정에 정통한 소식통들은 평가한다.
한 소식통은 “(인도네시아에서) 프랑스와 가까운 쪽이 주도권을 잡고 어젠다를 이끄는 반면, 한국과의 협력을 주장하는 측은 입지가 매우 약해졌다”면서도 “프랑스 무기 도입을 위한 연부액 규모 등 구체적인 사항은 정해진 게 없는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이 소식통은 “인도네시아가 당장 프랑스 무기를 살 듯 보이지만, 실제 진행되는 것은 많지 않다”며 “우리나라도 (무기도입) 사업이 잘 진행되면 아무 말 없지 않나. 사업이 정상 진행된다면 이런 뉴스가 계속 나오겠나. 뭔가 안 맞는게 있다는 의미”라고 덧붙였다.
논란이 불거지자 방위사업청은 20일 입장자료를 통해 “KF-X 공동개발과는 별도의 사안으로 판단한다”며 인도네시아가 사업 지속 참여 의지를 표명한 바 있다고 밝혔다.
하지만 KF-X가 유리한 상황은 아니라는 지적이 나온다. 다른 소식통은 “현지에서는 ‘프랑스는 인도네시아의 경제 여건을 고려해 선제적으로 다양한 제안을 하는데, 한국은 동업하기로 했으니 분담금 빨리 내라고 한다’는 인식이 있어 한국과의 협력 주장이 힘을 얻지 못하는 실정”이라고 말했다.
◆‘손절’은 손해…창의적 해법 마련해야
인도네시아는 한국과 방위사업 협력에서 약속을 지키지 않고 있다. KF-X 공동개발 분담금 6044억원을 연체 중이고, 2019년 3월 대우조선해양에 2차로 주문한 잠수함 3척과 관련해서도 계약금 납입 등 절차 이행을 하지 않고 있다.
반면 F-15EX, F-16V, 라팔 전투기와 스콜펜급 잠수함 등 미국과 유럽 무기도입은 끊임없이 제기되는 상황이다. “인도네시아와 관계를 끊고 KF-X를 독자 개발하자”는 목소리가 높아지는 이유다.
이에 대해 방산업계와 전문가들은 “그건 프랑스가 바라는 것”이라며 우려를 표시한다.
국방기술품질원이 발간한 ‘2020 세계 방산시장 연감’에 따르면, 인도네시아는 동남아에서 가장 매력적이고, 가장 급격히 성장하는 방산 시장이다. 2020년대 인도네시아의 전력증강 예상 규모만 293억 달러(32조 4900억 원)에 달한다.
미국, 영국, 네덜란드, 러시아 등 주요 선진국들은 시장 장악을 위해 인도네시아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군사장비와 관련 서비스를 팔고 있다.
후발주자인 인도는 테러와의 전쟁을 포함한 전략적 동반자 관계를 맺었다. 터키는 중형전차와 중고도 무인기 공동개발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일본도 최신 스텔스 프리깃함인 30FFM을 공동개발 형식으로 인도네시아에 판매하는 방안을 추진중이다.
라팔 수출에 적극적인 프랑스도 인도네시아 시장에 뒤늦게 뛰어들었다. 수년전까지는 에어버스가 주로 활동했지만, 현재는 닷소와 스콜펜급 잠수함 제작사인 나발 그룹 등이 전면에 나서는 것으로 전해졌다.
방산업계 관계자는 “프랑스가 무기 판매를 위해 인도네시아 정·관계에 굉장히 공을 들이고 있다”고 전했다.
핵잠수함에 이어 미스트랄급 강습상륙함이 남중국해로 출동하는 것도 프랑스 국방기술을 과시하려는 의도도 있다는 평가다.
이같은 상황에서 KF-X 공동개발이 무산되면, 동남아에서 국산 무기를 많이 구매한 핵심 시장을 경쟁국에 고스란히 내주는 결과를 초래한다.
미 공군 고등훈련기 사업 수주 실패 이후 항공무기 수출에서 반전의 모멘텀을 얻지 못하는 현 상황이 장기간 지속될 위험도 있다.
한국 공군의 부담이 가중될 우려도 배제할 수 없다. 인도네시아가 KF-X 48대를 자체 생산해도 레이더 등 주요 구성품은 한국 업체가 공급할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인도네시아가 KF-X를 만들지 않으면 48대 물량의 구성품 공급은 백지화된다. 당초 예상보다 공급 규모가 줄어들면 대당 단가는 상승한다. 제작사인 한국항공우주산업(KAI)은 KF-X 개발과 생산에 따른 손익분기점 달성이 그만큼 어려워진다.
물량 보장과 생산라인 유지 등을 위해 KF-16을 20대 추가 생산했던 것처럼 산업적 측면에서 공군이 당초 계획했던 수량 외에 KF-X를 추가 구매해야 할 수도 있다.
지금으로서는 분담금 납부를 일정 기간 유예해주거나 현물 납부, 기술이전 확대, 융자 등을 통해 인도네시아의 태도 변화를 이끌어내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다.
지휘통제체계, 경찰용 장갑차, 고속단정 등 인도네시아의 안보위협을 고려한 ‘맞춤형 패키지’ 제안도 필요하다. 프랑스처럼 ‘대마불사’ 방식으로 거래 규모를 크게 키워 인도네시아가 발을 빼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KF-X는 우리나라가 처음으로 만든 전투기다. 항공우주산업 발전과 고부가가치 산업 수출 증대 등의 효과가 기대되는 ‘핫 아이템’이다.
수십년간의 노력으로 어렵게 만든 KF-X가 한국만 사용하는 ‘갈라파고스 무기’로 전락한다면 국내 방위산업의 미래를 장담하기 어렵다. 적극적인 정책 추진으로 인도네시아의 태도를 바꿔 해외 방산시장을 지켜야 하는 이유다.
박수찬 기자 psc@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