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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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위안화 속도내는 중국… 美·中 ‘화폐전쟁’ 불붙나

인민은행, DCEP 상용화 고삐
전자지갑 속 법정화폐
2014년부터 국가차원 디지털 통화 연구
지방 대도시 이어 2021년 베이징서 공개 실험
현금소비 대체서 무역결제까지 확대 구상
2022년 베이징 올림픽 전 정식 도입 관측

달러화 패권에 도전장
경제블록 ‘일대일로’ 통해 활용 늘릴 듯
국내외 자금 흐름 파악… 돈세탁·탈루 방지
체제 강화·국민 통제 수단 활용 가능성도
자본 규제로 유동성 한계… 금융개혁 필요
지난해 12월 중국 장쑤성 쑤저우 지역 주민 10만명은 2000만위안(약 34억7000만원)을 나눠가졌다. 1인당 200위안이었다. 이들은 돈을 받았지만, 지폐 실물은 없었다. 중국 중앙은행인 인민은행이 지급한 이 돈은 스마트폰에 설치한 ‘전자지갑’ 앱에 숫자로 ‘200’이라고 표기만 됐을 뿐이다. 인민은행의 디지털 위안화 실험에 참여한 주민 왕주(39·여)씨는 집 세제 구입에 200위안을 모두 썼다. 구입 방법은 중국의 대표적 전자상거래 업체 징둥을 통해서였다. 온라인 플랫폼 중 디지털 위안화 결제 시스템을 도입한 것은 징둥이 처음이다. 왕씨가 징둥에서 구입한 세제는 205위안으로 인민은행에서 지급한 200위안보다 많았지만, ‘전자지갑’ 앱 설치 시 연동한 은행 계좌에서 나머지 5위안이 자동으로 빠져나갔다. 왕씨는 “다른 온라인 결제와 마찬가지로 순조롭게 진행됐다”고 말했다.

 

쑤저우에서 식당을 하는 마씨는 디지털 위안화 실험에 참여하기 위해 ‘전자지갑’을 스마트폰에 설치했다. 실험 일주일 후 마씨는 “위챗페이나 알리페이와 달리 수수료가 없었다”며 “그래도 전자지갑과 다른 결제 앱을 같이 사용할 것”이라고 말했다.

‘물물교환 → 조개껍데기 등 실물 화폐 → 금 등 금속화폐 → 지폐 → 디지털 화폐(?)’

경제생활의 필수 요소인 화폐가 우리에게 익숙한 지폐에서 다른 형태로 변화할까. 화폐의 가치가 아니고 단순히 형태가 바뀌는 것이긴 하지만, 기술이 더해지며 실물이 없는 디지털 화폐가 등장할 가능성에 이목이 집중된다.

세계 주요국 중에선 중국이 ‘중앙은행 디지털 통화(CBDC)’ 도입에 가장 빠른 속도를 내고 있다. 중국에선 CBDC를 ‘디지털화폐전자결제(DCEP)’로 부르는데, 명칭만 다를 뿐 ‘디지털 위안화’로 보면 된다. 중국은 디지털 위안화 도입을 통해 대내적으로는 체제 강화, 대외적으로는 글로벌 통화의 주도권 확보 등을 기대하고 있다.

◆‘현금 없는 사회’… 디지털 위안화 도입

중국에서 물건을 살 때 현금을 내면 상점 주인은 대부분 당황한다. 당장 거스름돈을 내줄 현금이 없기 때문이다. 신용카드 등을 내밀면 더 난감해한다. 카드를 계산할 기계가 없거나, 찾기조차 힘든 구석 어딘가에 있기 때문이다.

중국이 현금 없는 사회를 구축할 수 있었던 것은 알리바바의 알리페이(쯔푸바오)와 텐센트의 위챗페이(웨이신쯔푸) 등 은행 계좌와 연계된 결제 앱 덕분이다. 모든 가게, 노점상, 심지어 적선하는 이들조차도 자신의 스마트폰에 알리페이나 위쳇페이 앱만 깔면 QR코드가 생성되고 은행 계좌와 연계해 개인 간 이체가 가능해진다. 체크카드처럼 은행 계좌에 있는 돈이 바로 빠져나가는 방식이다. 하지만 발급 과정은 체크카드 만드는 것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간단하다. 앱만 설치하면 끝이다.

한국 사회는 신용카드 등을 이용한 거래가 활발하지만, 중국은 신용카드가 활성화될 정도로 경제적 신뢰도가 높지 않다. 그러다 보니 바로 현금결제를 하는 알리페이와 위챗페이가 활성화했다. 2019년 기준 중국 결제 건수 5건 중 4건(80%)을 모바일 거래가 차지했다. 모바일 거래 중 알리페이와 위챗페이의 결제 비중은 94%를 차지한다. 이 앱이 없으면 기본적 생활이 불가능할 정도다.

알리페이와 위챗페이가 활성화하자 인민은행은 2014년부터 국가 차원의 디지털 통화 연구에 돌입했다. 2019년부터 민간을 대상으로 주민들이 직접 디지털 위안화를 실생활에서 사용하고 문제점을 찾는 실험을 반복 시행하고 있다. 지난해 10월 선전, 12월 쑤저우에서 공개 실험을 진행한 뒤 춘제(설) 기간인 2월 10∼17일 베이징에서 3차 공개 실험을 했다. 지방 대도시에 이어 수도에서 실험이 진행돼 조만간 정식 도입되는 것 아니냐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자금 흐름 파악… 체제 강화 수단 가능성

‘알리페이와 위챗페이가 지갑이라면 디지털 위안화는 지갑에 있는 돈이다.’

디지털 위안화는 법정화폐다. 본원통화(M0)로도 불리는 현금 자체를 말한다. 알리페이와 위챗페이 등을 사용하려면 앱을 현금이 들어 있는 은행 계좌와 연동해야 하는데, 디지털 위안화가 이 현금인 것이다. 현금이기 때문에 전자지갑에 넣어둔 돈에는 이자가 쌓이진 않는다. 또 디지털 위안화 결제 시스템을 갖춘 상점은 결제를 거부할 수 없다. 거부란 곧 현금을 받지 않겠다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개인이 디지털 위안화를 쓰는 방식은 인민은행 또는 공상은행, 건설은행 등 주요 은행에서 ‘전자지갑’ 앱을 내려받아 스마트폰에 설치하면 다른 이의 지갑으로 돈을 보내거나 본인이 받을 수 있다. 은행 계좌가 없어도 사용하는 데 문제는 없다. 다만 잔액 부족 등 문제가 생길 때 결제를 원활하게 하려면 연동 계좌를 설정해 놓는 게 편하다. 그 이후는 알리페이나 위챗페이와 방식이 똑같아 불편함은 없다.

더구나 디지털 위안화는 비행기, 산간벽지 등 인터넷이 안 되는 곳에서도 ‘펑이펑(부딪치기)’으로 부르는 NFC(가까운 거리에서 무선 데이터를 주고받는 통신 기술) 방식을 써서 결제할 수 있다.

디지털 위안화는 가상화폐인 비트코인과 달리 익명성을 보장하지 않는다. 개인이 단 몇 위안을 쓰더라도 자금 이동 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추적할 수 있다. 중국 정부는 디지털 위안화를 통해 국내외 자금 흐름, 이동 실태 등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어 돈세탁, 세금 탈루 등 각종 범죄 방지나 처벌에 활용할 수 있다.

하지만, 정부가 확보한 개인정보는 현 공산당 체제를 강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동원될 가능성도 크다. 디지털 위안화 사용을 통해 수집된 개인정보 등을 국민 통제 수단으로 활용할 수 있는 것이다.

◆기축통화 달러에 도전장… ‘화폐 전쟁’ 예고

중국이 디지털 위안화에 속도를 내는 것은 미 달러를 기축통화로 한 국제경제 질서에 변화를 꾀하기 위해서다. 미국과의 갈등이 지속되는 가운데 디지털 위안화를 통해 달러 위주의 현 경제 질서에 도전장을 내밀어 ‘화폐 전쟁’을 예고한 셈이다.

중국은 최근 인민은행 산하 디지털통화연구소가 국제결제시스템망(SWIFT)과 공동 출자해 합작법인을 설립하기로 했다. SWIFT는 전 세계 200여개국 1만1000여개 금융사 간 국제 결제를 중개하는 기구이자 시스템이다. SWIFT는 기축통화 달러를 발행하는 미국의 입김이 강한데 이에 맞서 중국이 합작사 설립을 통해 안전판 조성에 나선 셈이다. 홍콩의 자치권 훼손 시 미국이 SWIFT에서 중국이나 홍콩을 차단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 후 합작사 소식이 나온 점이 이를 뒷받침한다.

이와 함께 인민은행은 홍콩·마카오와 태국, 아랍에미리트(UAE) 등에서 디지털 위안화를 사용하는 시험에도 나선다. 국내를 넘어 국가 간 통용 방식을 살펴보겠다는 것이다. 또 중국이 주도하는 경제 블록 ‘일대일로’(육상·해상 실크로드) 안에서 디지털 위안화 활용을 늘려 존재감을 키울 것이란 관측이 제기된다.

인민은행이 디지털 위안화를 언제부터 공식적으로 사용할지 아직 밝히지 않고 있으나, 전문가들은 그 시기를 2022년 2월로 예정된 베이징 동계올림픽 직전이 될 것으로 예상한다.

하지만 위안화의 국제화는 중국의 자본 규제에 발목을 잡힐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위안화가 달러처럼 기축통화가 되려면 사용량이 늘어야 하는데, 그 전제가 주요국 통화와 자유롭게 교환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중국 자체의 금융 규제로 위안화의 유동성을 늘리는 데 한계가 있다. 국가 간 환율과 수수료 산정 등 문제도 해결해야 한다.

국내총생산(GDP)을 기준으로 중국은 미국에 이어 세계 2위 경제대국이지만 위안화의 위상은 여전히 초라하다. SWIFT에 따르면 지난해 8월 국제 지급 거래에서 위안화 비중은 1.91%에 그쳐 달러(38.96%), 유로(36.04%), 파운드(6.7%)에 크게 미치지 못했다. 미·중 갈등으로 미국의 압박이 거센 상황에서 위안화 사용을 크게 늘릴 수 있을지도 미지수다.

쉬치옌 중국사회과학원 세계경제·정치연구소 연구원은 “디지털 위안화가 국제화하려면 디지털 기술 외에 가장 근본적인 금융개혁이 필요하다”며 “인민은행이 위안화 국제화를 추진하는 데 필요한 것은 기술이 아니라 금융 계좌의 완전한 자율화로 금융 시장이 개방돼야 국가 간 효율적 운영이 가능하다”고 지적했다.

 

베이징=이귀전 특파원 frei5922@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