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시장은 미국의 서부개척을 촉발시켰다. 캘리포니아의 금광과 네바다의 은광 발견만큼의 영향력을 발휘했다. 19세기 초 중국은 세계경제생산의 30%를 선회하는 인구 4억을 가진 거대한 시장이었다. 미국은 중국 시장 진출의 후발주자로 더 빠르게 접근해야만 하는 강박관념에 빠졌다. 파나마운하의 개통(1914) 이전에 동부에서 중국까지의 여정은 길었기 때문이다. 대안으로 서부가 각광을 받은 연유다.
이후 오리건주(州), 워싱턴주와 북부캘리포니아주가 중국 교역의 거점으로 급성장한다. 이 지역을 탐낸 이들이 또 있었다. 영국과 러시아였다. 이들의 진출을 저지한 이가 존 애덤스 대통령의 아들 존 퀸시 애덤스였다. 공교롭게 그 역시 훗날 러시아와 영국 대사를 역임하고 대통령이 된다.
청나라와 ‘왕샤조약’ 체결 이후 미국의 대륙횡단철도 아이디어가 탄력을 받았다. 조약을 협의한 쿠싱은 1845년의 기고문에서 상업계의 신시대가 열렸다면서 신대륙 발견 다음으로 최대 사건으로 이를 묘사했다. 그 해 이 사건을 대륙횡단철도의 필요성으로 승화시킨 이가 중국 무역으로 성공한 사업가 아사 휘트니(Asa Whitney)였다.
그는 미시간호에서부터 캘리포니아를 연결하는 철도사업을 위해 로비에 나섰다. 당시 30개주 중 18개주의 동의를 받았으나 사업을 현실화하는 데 역부족이었다. 그러나 그의 노력은 헛되지 않았다. 그가 은퇴한 지 10년 만에 미 의회에서는 1862년에 태평양철도법이 통과되었다.
1863년에 착공한 아이오와와 네바다까지 연결된 기존의 철도선을 캘리포니아로 연장하는 사업이 1869년에 완공됐다. 6개월 걸린 미 대륙의 횡단이 6일로 줄어들었다. 그런데 그 해 수에즈운하가 개통되었다. 결국 미 대륙횡단철도사업의 당위성은 중국 교역에서 국내경제 발전으로 전환되었다.
미국의 대륙횡단철도사업 구상은 미·중 교역에서 비롯됐다. 착공되면서 이의 주된 노동력은 중국인이었다. 이들의 이민이 급증하자 미국은 사상 첫 이민금지법(1871)을 통과시킨다. 역사의 아이러니를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주재우 경희대 교수·국제정치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