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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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현의 일상 속 문화사] 같은 시공간을 산 츠바이크·프로이트·요제프 1세·히틀러·스탈린·트로츠키… 오스만제국 무슬림서 온 커피 마시며 지성인들, 사상·학문 논하다

(16) 빈 카페는 어떻게 20세기 만들었나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수도
다양한 민족으로 구성돼 다문화 교차
황제도 유대인에 시민권 줘 차별 안해
급진적 지식인·문화인 등 해방구 역할
마음껏 이야기 할 수 있는 사교장으로
20세기 말의 인터넷 공간 연상시켜
20세기 초 빈의 카페 문화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소인 카페 센트럴의 모습.

20세기 초의 빈을 보여주는 흥미로운 그림이 인터넷에서 인기를 끌었다. 물론 당시 빈은 지금의 오스트리아가 아닌,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1867∼1918년)의 수도였다. 이 그림은 20세기의 인류 역사를 크게 바꿔놓은 인물들이 빈이라는 같은 공간에, 그것도 1913∼1914년이라는 같은 시간에 모여있었다고 설명한다.

심리분석의 상징처럼 된 지그문트 프로이트와 오스트리아·합스부르크 제국의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는 물론이고, 훗날 나치 독일을 이끌고 2차 세계대전을 이끌게 될, 그러나 당시에는 실패한 미술학도였던 무명 청년 아돌프 히틀러, 그런 히틀러의 침략에 맞서 2차 대전 최대의 희생자를 낳은 전투를 치렀던 이오시프 스탈린, 그리고 스탈린·레닌과 함께 볼셰비키 혁명을 일으켜 소비에트연방을 세웠지만 스탈린과의 권력투쟁에서 밀려나 암살당한 레프(레온) 트로츠키가 모두 같은 시공간에 살고 있었다. 그림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훗날 유고슬라비아연방의 대통령이 되어 소련의 스탈린과 서방 세계 사이에서 중립외교를 펼친 것으로 유명한 요시프 티토 역시 같은 시기에 빈에 머물렀다고 알려져 있다. 20세기 역사를 바꾸게 될 이들은 어떻게 같은 시기에 한 도시에 머무르게 되었을까?

이들이 빈을 찾아온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당시 빈의 분위기를 알아야 하고, 당시 빈을 이해하기 가장 좋은 방법은 좀 엉뚱하게 들리겠지만 빈의 카페 문화, 특히 카페 센트럴(Cafe Central)이 가지고 있었던 분위기를 파악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먼저 커피가 이 지역에 어떻게 도래하게 되었는지 살펴보는 게 좋다.

오스트리아에 전설처럼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다. 1683년, 오스만 제국(지금의 터키)이 두 달 동안 빈을 포위하고 있었다. 이 포위를 풀기 위해 신성로마제국과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이 힘을 합쳐 오스만 제국군과 전투를 벌였고, 이 전투는 궁극적으로 오스만 제국을 지금의 헝가리 영토에서 밀어내면서 기독교 유럽을 지킨 전쟁으로 이어졌다. 그런데 빈 전투를 끝낸 폴란드 왕 얀 3세 소비에스키가 터키군이 떠난 자리에서 특이하게 생긴 콩이 담긴 자루들을 발견했다고 한다. 왕은 그 자루들을 장교 중 한 사람에게 가지라고 넘겨줬는데, 예르지 쿨치즈키라는 그 장교가 왕에게서 받은 콩은 바로 커피콩이었고, 쿨치즈키는 그걸로 이 지역에서 첫 번째 카페를 차렸다는 얘기다.

이 전설이 얼마나 신빙성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커피의 역사에 따르면 아프리카 에티오피아가 원산지인 이 작물이 카페인을 원하는 사람들의 음료로 널리 확산시킨 사람들은 아라비아 지역의 무슬림들이 맞다. 지역에 따라 엄격한 종교적 이유로 술을 마시지 못해도 커피는 자유롭게 마실 수 있었기 때문이다. 술탄들은 커피콩이 외국으로 빠져나가지 못하게 막았지만 커피가 주변 지역으로 퍼져나가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이렇게 퍼져나간 커피는 이슬람 문화권과 동일시되었고, ‘아라비아의 와인(The Wine of Araby)’이라는 별명까지 붙었다. 따라서 무역과 전쟁 등으로 오스만 제국과 접점이 있었던 중부·동부 유럽의 커피문화는 무슬림에게서 직접 전달받았을 가능성이 높다.

20세기 초 빈에서 현대 세계사를 만들어낸 인물들이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 살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지도.

그렇게 유럽에서도 일찍 시작된 빈의 카페 문화는 우리에게도 익숙하면서도 독특한 면을 가지고 있었다. 대리석 테이블과 소네트(Thonet) 의자, 그리고 그날의 신문이 놓인 테이블을 갖춘 전형적인 빈의 카페는 지식인들이 모이기 좋은 장소였다. 오스트리아의 대표적인 작가 슈테판 츠바이크는 빈의 카페들이 일종의 ‘민주주의의 클럽’ 같은 곳이었다고 회고했다. 커피값은 비싸지 않아서 누구나 마실 수 있었고, 글을 쓰고, 이야기하고, 신문을 읽으면서 테이블에 몇 시간씩 앉아있어도 전혀 싫은 기색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오히려 웨이터들은 오래 앉아있는 손님들에게 돈을 받지 않고 시원한 물을 챙겨주었고, 저녁에는 홀 안에 있는 피아노를 연주하고 책 낭독회 같은 행사가 열리는, 그야말로 지성인들을 위한 사교 장소였다.

그런 빈의 카페들 중에서도 1876년에 문을 연 카페 센트럴은 특히 유명했다. 오스트리아 모던 건축의 대명사인 아돌프 루스나 슈테판 츠바이크 같은 문화계 인사들은 물론이고, 프로이트와 알프레트 아들러 같은 초기 심리학의 대가들, 그리고 앞서 말한 트로츠키, 티토, 히틀러처럼 훗날 유럽과 세계의 정치에 큰 영향을 미칠 인물들이 모두 카페 센트럴을 즐겨 찾던 손님들이었다.

빈에 살던 사람들이 카페를 찾은 이유는 알겠지만, 그들은 왜 빈을 찾아오게 되었을까? 빈은 1913년부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수도였다. 이 제국은 다양한 민족들로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수도 빈은 여러 문화가 섞이기에 좋은 환경이었다. 무려 15개의 나라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군대에서는 장교가 (자국어인) 독일어 외에도 무려 11개 언어로 명령을 내렸고, 국가 역시 12개 언어로 불렸다고 하니 그 분위기를 대략 상상할 수 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다양한 문화의 국가들을 묶어두었기 때문에 결국 오래 버티지 못하고 해체되었다. 하지만 제국이 유지되는 동안에도 국민을 강하게 통제하지 않았기 때문에 수도 빈은 전 유럽에서 급진적인 생각을 가진 지식인, 정치인, 학자들이 자국 정부의 감시와 통제를 벗어나 자유롭게 사상과 학문을 발전시키고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지적인 해방구 같은 곳이었다. 특히 프란츠 요제프 황제는 1867년에 유대계 사람들에게 다른 민족과 똑같은 시민권을 주었기 때문에 그들이 차별받지 않고 대학교육을 받을 수 있었던 나라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었다. 유대계가 20세기 초중반에 과학을 비롯한 다양한 학문 분야를 휩쓸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프로이트 역시 유대계 부모에게서 태어났다) 빈이 어떤 역할을 했을지 짐작하고도 남는다.

결국 차별받던 유대계 학자들, 혁명을 모의하던 젊은 공산주의자들, 전통을 끊고 완전히 다른 미술·건축을 꿈꾸던 예술가들에게 빈의 카페는 같은 생각을 하는 동료들과 남의 눈치를 보지 않고 마음껏 이야기할 수 있는 장소였던 것이다.

그런 이유로 20세기 초의 빈은 20세기 말의 인터넷 공간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지금은 대부분의 인터넷 활동이 스마트폰의 앱이라는 공간에서 이루어지지만 인터넷이 일반에 확산되기 시작하던 1990년대에는 모두가 월드와이드웹을 찾았고, 그곳에서 동호회를 만들어 뜻이 같은 사람들과 교류했고, 어설픈 실력으로 웹사이트를 만들어 사람들을 불러들였다. 인터넷이 세상을 바꿀 거라는 사실에는 동의했지만 그것이 어떤 모습이 될지 아무도 몰랐기 때문에 혁명적인 아이디어가 쏟아지던 시절이다. 그 당시에는 집에서는 인터넷이 느렸기 때문에 인터넷 ‘카페’를 찾았다는 건 우연일까? 지금은 소셜미디어의 알고리즘이 보여주는 것만 소비하고, 영화를 보고 게임을 하는 공간으로 전락한 인터넷을 아쉬워하는 사람들에게 20세기 초 빈의 모습은 멀지 않은 과거를 떠올리게 하는 먼 과거의 한 장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