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에 따른 선수 보호 차원에서 오는 7월 개막 예정인 도쿄올림픽에 불참하기로 했다. 도쿄올림픽을 남북, 북·미, 북·일 관계 개선의 전기로 삼아 한반도 평화프로세스를 추진하려던 문재인정부 구상도 무산됐다.
북한 체육성은 6일 ‘조선체육’ 홈페이지를 통해 “조선올림픽위원회는 총회에서 악성 바이러스 감염증에 의한 세계적인 보건위기 상황으로부터 선수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위원들의 제의에 따라 제32차 올림픽 경기대회에 참가하지 않기로 토의결정했다”고 밝혔다. 북한이 하계올림픽에 불참하는 건 1988년 서울올림픽 이후 33년 만이다.
총회는 지난달 25일 평양에서 화상회의 방식으로 열렸다. 당시 북한은 총회 개최 사실은 보도했지만 올림픽 불참 결정에 대해서는 밝히지 않았다. 북한이 뒤늦게 매체를 통해 구체적인 결과를 공개한 것이다.
북한이 표면적으로 내세운 불참 사유는 코로나19 방역이지만 삐걱거리는 북·일관계도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북한은 일본인 납치 문제와 대북 제재 등으로 일본과 불편한 관계를 이어왔다. 양무진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는 “외형상으로는 코로나 감염으로부터 선수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고 하지만 올림픽 참가가 실익이 없다는 판단과 함께 제재 연장 등 일본의 대북 적대시정책에 대한 정치적 반감도 작용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통일부 당국자는 이날 기자들과 만나 “도쿄올림픽이 한반도 평화와 남북 간 화해·협력을 진전시키는 계기가 되기를 바라왔으나 코로나19 상황으로 그러지 못하게 된 데 대해 아쉽게 생각한다”면서 “앞으로도 스포츠 등 여러 분야에서 한반도 평화와 협력을 진전시킬 계기를 찾기 위한 노력을 계속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일본 정부 대변인 가토 가쓰노부(加藤勝信) 관방장관은 이날 각료 회의 후 브리핑에서 북한의 도쿄올림픽 불참에 대한 질문을 받자 “보도는 알고 있지만 대회조직위원회 등의 조율 과정인 만큼 그 조정을 주시하겠다”고 말했다.
◆한반도 정세 ‘반전 이벤트’ 사라져… 갈 길 잃은 文 대북정책
북한이 올해 열리는 도쿄올림픽에 참가하지 않겠다고 밝히면서 문재인정부의 한반도 평화프로세스가 또다시 난기류에 봉착했다. 도쿄올림픽을 통해 이를 재가동하려던 문재인정부 구상이 헝클어지게 된 것이다. 특히 당분간 남북관계와 북·미관계를 개선할 마땅한 모멘텀이 없다는 것이 문제다. 문재인 대통령으로서는 답답한 상황에 부닥쳤다는 분석이 나온다.
문 대통령은 올해 여러 차례 도쿄올림픽을 계기로 한반도 평화프로세스를 재가동하겠다는 생각을 드러내 보였다. 지난달 1일 3·1절 기념식 연설에서 문 대통령은 “올해 열리게 될 도쿄올림픽은 한·일 간, 남북 간, 북·일 간 그리고 북·미 간 대화의 기회가 될 수도 있다”며 “한국은 도쿄올림픽의 성공적 개최를 위해 협력할 것”이라고 다짐한 바 있다.
이러한 의중은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을 통해 남북관계와 북·미관계 개선을 끌어냈던 경험과 무관치 않다. 한반도 평화프로세스는 한반도에 완전한 비핵화와 항구적인 평화를 정착하기 위한 문재인정부의 대북관계 구상이다. 남북관계 진전과 북·미 비핵화 협상의 선순환이 핵심 연결고리다.
‘한반도 평화프로세스’는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부터 구체화됐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동생인 김여정 당시 노동당 중앙위원회 제1부부장이 동계올림픽 개회식에 참여하면서다. 이후 한 해 동안 세 차례의 남북정상회담과 한 차례의 북·미정상회담이 진행됐다.
좋아 보였던 남북관계와 북·미관계는 2019년 하노이에서 열린 2차 북·미 정상회담이 어그러지면서 돌변했다. 북·미 비핵화협상이 난항에 빠지면서 남북관계도 덩달아 악화했다. 북한은 문재인정부에 대한 적대적 감정을 보였고, 지난해 8월에는 개성 남북 공동연락사무소를 폭파했다. 이런 상황에서 돌파구로 기대를 모았던 도쿄올림픽에서도 북한이 불참 의사를 밝힌 것이다.
문재인정부로서는 남은 시간이 넉넉하지 않다. 올해 하반기부터는 사실상 내년 대선 국면으로 돌입한다. 남북관계 진전 동력을 확보하기가 어렵다. 김여정 노동당 부부장이 연이은 담화를 통해 문 대통령을 강력히 비난하는 상황에서 북한을 달랠 국내 분위기를 형성하기가 쉽지 않아 보인다.
대외적 상황도 마냥 편안하지는 않다. 조 바이든 미 행정부는 북한이 반발하고 있는 인권문제도 대북정책 중 하나로 고려하고 있다. 서훈 국가안보실장은 전날 미국 방문 일정을 마치고 귀국한 자리에서 “미국 측이 구상했던 대북정책의 골격에 대한 설명이 있었고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 대단히 깊이 있고 생산적인 토론을 가졌다”고 말했다. 결국 문재인정부가 얼마나 바이든 행정부의 대북정책에서 우리 측 뜻을 관철할지가 중요 변수가 됐다.
한 여권 관계자는 “일본 올림픽 조직위원회가 북한 참여에 매우 냉소적이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며 “북한이 코로나 상황에서 이를 감수하면서 참가할 필요가 있느냐는 결론을 내린 것 같다”고 설명했다. 이어 “90% 이상은 닫혔지만 한·미 조율을 통해 북한에 대화 참여의 명분을 제공한다면 재검토가 있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박원곤 이화여대 북한학과 교수는 이날 통화에서 “도쿄올림픽을 통해 한반도 평화프로세스를 돌리겠다는 건 미국과 일본도 동의한 점인데 북한이 이런 메시지를 보낸다는 점에서 그럴 생각이 없다는 것이 대외 메시지 측면에서 읽혀진다”며 “우선 북·미관계가 풀려야 남북관계가 열린다. 바이든 행정부 정책에 동조해서 같은 정책을 만드는 게 중요하다”고 밝혔다.
◆코로나 이어… ‘흥행 차질 올라’ 파장 주시
일본 정부는 6일 북한의 도쿄올림픽 불참 결정이 알려지자 당혹해하면서 파장을 우려하는 분위기다.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일본 총리는 이날 오전 관저에서 취재진의 관련 질문에 묵묵부답으로 응하지 않았다고 산케이신문이 전했다.
주무부처 장관인 마루카와 다마요(丸川珠代) 올림픽 담당상은 오전 각료회의 후 기자들과 만나 “보도를 봤는데 상세한 내용은 확인 중”이라며 “무슨 사정인지 몰라 뭐라고 말씀드리기 어렵다”고 말했다. 대회조직위원회에서 각국 국가올림픽위원회(NOC)와 조율을 담당해 온 관계자는 “어떤 것도 들은 것이 없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고 교도통신이 전했다.
교도통신은 북한이 불참 이유로 코로나19로부터의 선수 보호를 제시해 다른 나라로 파급을 포함해 앞으로 영향이 우려된다고 진단했다.
북한의 이번 결정으로 코로나19 사태로 전망이 어두운 도쿄올림픽 흥행에 악재가 겹치게 된 셈이다. 국제올림픽위원회(IOC)는 그동안 올림픽에서 국제적 관심도가 높아질 수 있는 남북 공동선수단이나 공동입장 카드를 선호해왔는데 무산된 것이다.
북한의 결정에 최근 동북아 정세와 관련한 정치적 원인이 작용했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일본 정부 관계자는 스가 총리가 16일(현지시간)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북한 정세를 협의한다는 점을 거론하면서 “이 시점에서 불참을 표명한 의도를 분석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다른 관계자는 “정치적으로 흔들려는 것보다는 코로나19 상황이 정말 걱정스러운 것 아니냐”고 말했다고 마이니치신문이 전했다.
북한 전문가 히라이와 순지(平岩俊司) 난잔대 교수는 NHK에 “북한은 의료 체제가 취약해 외국과의 관계를 단절하는 아주 강력한 대응을 하고 있다”며 “만일 선수를 파견했다가 감염자가 생기면 북한에 돌아간 뒤 대응이 극히 어려울 것이라는 우려가 기본적으로 있다”고 말했다.
북·일 관계 개선을 위한 돌파구 마련도 쉽지 않을 전망이다. 스가 총리는 도쿄올림픽을 기회로 대화 채널이 단절된 북한 측과 접촉할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었지만 북한의 불참 선언으로 상황이 어렵게 됐다고 교도통신이 분석했다.
일본 정부 대변인 가토 가쓰노부(加藤勝信) 관방장관은 이날 브리핑에서 일본인 납북자 문제 해결에 미칠 영향을 묻자, “별개의 문제”라며 “납치 문제에 대해 일본 정부가 주체적으로 대처하고 북한과 직접 대화할 용의가 있다는 입장에는 변화가 없다”고 답했다.
한편 북한은 조선중앙통신 논평을 통해 스가 총리가 최근 북한의 미사일 발사에 대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 위반이라고 지적한 것에 대해 “자위권에 대한 노골적인 부정인 동시에 난폭한 침해”라고 반발했다.
원재연 선임기자, 도쿄=김청중 특파원, 이도형 기자 march27@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