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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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가포르 작가의 남북동행… 北제작 추정 애니로 보는 南시민항쟁

싱가포르 저명한 설치작가 호 추 니엔
‘숨 쉬는 스크린 스튜디오’와 함께 작업
북한 애니메이터 참여한 듯
제13회 광주비엔날레에서 눈길
호 추 니엔 ‘49번째 괘’ 전시 전경. 광주비엔날레 제공

이 애니메이션 영상, 어디서 많이 본 장면이다. 피켓을 들고 쓰러진 옆 사람을 일으켜 세우며 전진하는 사람들의 무리. 틀림없이 내가 아는 바로 그 이야기다. 확신도 잠시, 등장 인물들의 낯선 옷차림과 가면 탓에 “아닌가” 싶어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러고 보니 배경도 새까맣기만 하다. 장소나 지역도 감을 잡을 수 없다. 그저 어두운 공간 한가운데 앉아 앞뒤로 설치된 대형 화면에서 흘러나오는 영상과 소리를 보고 들으며 공간을 느낀다. 어느새 행진 대열에 함께하고 있는 듯하다. 자신을 자각하는 행진, 서로에게 의지하는 행진. 만화이지만 비장미가 진하게 느껴진다. 저곳은 어디일까, 누구의 무슨 이야기일까, 정체를 추적하며 영상에 빠져들던 중, 똥물을 뒤집어쓴 단발머리 여공이 고개를 숙이는 장면이 나온다. 아, 1978년 동일방직 노동자 똥물투척 사건! 한국인의 뇌리에 잊히지 않는 상징적 장면이 나오자, 그제야 이 화면들이 우리 역사 이야기였음을 알아챘다.

 

제13회 광주비엔날레가 열리고 있는 국립아시아문화전당에는 싱가포르 작가 호 추 니엔의 영상 설치 작품 ‘49번째 괘’가 상영되고 있다. 이 작품은 주역 64괘 중 49번째 괘인 ‘혁(革)괘’를 제목으로 한 것에서 추측하듯, 민중이 변화와 개혁을 일으킨 역사를 담은 애니메이션 작품이다.

 

작가는 5·18을 포함한 한국 민주화 역사의 실제 장면들을 방대하게 수집한 뒤, 스토리보드를 만들고 애니메이션으로 제작했다. 사진, 영상 등 사료부터, ‘1987’과 같은 역사 영화나 드라마의 장면들이 스토리보드에 사용됐다. 작가가 도록에 남긴 말에는 이번 작품을 제작하기 위해 그가 얼마나 많은 자료를 공부했는지가 나온다.

호 추 니엔 ‘49번째 괘’ 전시 전경. 광주비엔날레 제공

“우선 5·18민주화운동에 대해 배우는 것이 이 작품의 출발점이었습니다. 하지만 5·18을 조사하다 보니 한국사 전반에 대한 이해의 폭과 깊이를 확장해야 한다는 점을 깨달았습니다. 결국 1890년대 말 동학농민운동과 1940년대까지 이어진 일제 강점, 이 뒤를 따른 독재 정권과 착취, 그리고 미국의 간섭에 대한 저항에 이르기까지 지난 세기 한국사의 수많은 ‘풀뿌리’ 시위와 항쟁을 조사하게 되었습니다.” 그가 수집한 한국사, 나아가 아시아 전역에서 일어난 풀뿌리 운동에 대한 자료가 하나의 아카이브가 됐을 정도라고 한다.

 

작품의 의미를 더 심층적으로 만든 건 애니메이션의 제작사다. 전시장 벽면이나 브로슈어 등에 적힌 작품 참여자의 명단에 이 애니메이션 제작사는 ‘고요한 아침의 나라’에 위치한 ‘숨쉬는 스크린 스튜디오’라고만 표기돼 있다. 지난 1일 취재진에게 작품을 설명한 문경원 프로젝트 프로듀서는 “작가는 애니메이터들을 밝히고 있지 않지만, 설명을 통해 충분히 힌트를 주고 있다”고 말했다. 힌트는 이랬다. ‘그들(숨쉬는 스크린 스튜디오)이 처한 맥락에서 보았을 땐 정치적으로 민감한 내용이 될 수 있었기 때문에 한국의 역사를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요소들은 표현이 불가능하였고, 이에 따라 작가는 애니메이션 팀의 자체 판단에 따라 스토리보드에서 문제가 될 만한 부분을 바꿀 수 있도록 했다. … 스튜디오와 국가의 실제 명칭이 바뀌어 사용된 이유도 여기에 있다.’

 

현장에서는 북한이라는 말이 나왔고 고개를 끄덕였다. ‘고요한 아침의 나라’에 위치하며, ‘남한의 역사를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장면을 그릴 수 없었던 애니메이터’라는 설명은 그곳이 북한임을 간접적으로 드러냈다.

‘49번째 괘’가 상영 중인 모습. 광주=김예진 기자

북한의 애니메이션 제작 기술은 세계적으로 익히 알려져 있다. 북한은 미국 디즈니 애니메이션 라이언킹, 포카혼타스 같은 대작에 참여했고,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등 유럽 국가들에서도 하청을 받았다. 우리 역시 ‘뽀롱뽀롱 뽀로로’, ‘왕후심청’을 공동 제작한 바 있다. 불과 3년 전, 남북 화해 무드가 무르익었을 당시에도 남북 만화 합작이 다시 세간에 거론되기도 했다. 싱가포르 작가의 총괄, 남한의 아티스트 백현진과 박민희가 만든 음향, 북측 누군가 제작한 화면이 어우러진 작품은 주최 측 표현대로 ‘지정학적 장벽을 넘은 초현실주의’로 다가왔다.

 

도록을 통해 텍스트로나마 공개된 제작과정은 흥미롭다. 작가는 ‘숨쉬는 스크린 스튜디오’가 매우 탄탄한 애니메이션 제작 역사를 갖고 있고 애니메이터들은 고도로 숙련돼 있다는 점을 높이 평가했다. 당초 작가는 그들을 방문할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그러나 코로나19로 불가능해졌고, 고민 끝에 그 상황을 받아들이고 작품에 녹였다. 작가가 구성한 스토리보드를 어떻게 표현할지, 애니메이터에게 당초 계획보다 많은 결정권을 준 것이다. 한국임을 드러내는 등장 인물의 옷이 바뀐 것도 그래서다. 마침 껍질이나 가죽을 벗기는 ‘탈피’를 의미하는 ‘혁(革)’ 자의 어원과 제작과정이 공명했다.

 

남북 동시 수교국이자 최초의 북·미정상회담이 열린 나라 싱가포르에서 온 저명한 작가의 남북 동행. 갈등과 협력을 오간 한반도 역사의 한 공백기에 불쑥 들어온 외국인 작가의 의도가 궁금증을 자아내지만, ‘숨쉬는 스크린 스튜디오’의 정체에 대해 주최 측은 공식확인을 거부했다.

 

김선정 광주비엔날레 대표는 “벽화를 보고 뱅크시가 한 것임을 알아도 우리가 알아내려 하지 않는 것처럼, 또 뱅크시가 누구인지 알아내려 하지 않는 것처럼, 그런 예술의 사례로 이해해달라”고 했다. 작가 역시 애니메이션 제작사에 대한 인터뷰나 언급이 곤란하다 전해왔다.

 

‘숨쉬는 스크린 스튜디오’에서 고민하며 그림을 그려낸 이들을 북한으로 여길지, 지금 그대로 고요한 아침의 나라 사람들이라고 부를지, 아니면 제3의 누군가로 상상할지는 관람객의 몫이다.

 

광주=김예진 기자 yejin@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