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메뉴 보기 검색

[배연국칼럼] 마침내 천리마를 세우다

4·7 재보선 여당 완패 원인은
거대 의석만 믿고 권력 휘두른 탓
국정 폭주의 폐해 막기 위해선
교만한 말과 기수 모두 바꿔야

화장실에서 볼일을 본 뒤에 변기 시트를 올려놓느냐, 내려놓느냐? 하찮은 일이지만 가정에선 굉장히 중요한 문제다. 갈등의 단골 불씨가 되기 때문이다. 여성은 남성이 소변을 본 뒤 시트를 올려놓는 게 불만이고, 남성은 소변을 볼 때마다 여성이 내려놓은 시트를 올리느라 짜증스럽다. 미국 미시간주립대 경제학과 최재필 교수가 논문을 통해 해법을 제시했다. 각자 변기 시트를 쓴 대로 놔두라는 것이다. 변기를 쓴 뒤 같은 성이 다시 사용할 수 있으므로 시트를 올리거나 내려놓을 경우 불필요한 비용이 발생한다는 이유에서다.

경제학자가 간과한 대목이 있다. 위생적인 부분이다. 남성이 서서 소변을 보면 오줌 방울이 변기 바깥으로 튀기 마련이다. 하루 7번 소변을 볼 경우 변기 주변으로 미세하게 튀는 오줌이 2300방울에 이른다는 실험 결과도 있다. 지린내가 나고 세균이 번식하는 불결한 환경이 불가피하다. 그런 까닭에 요즘엔 앉아서 소변을 보는 남성들이 느는 추세다.

배연국 논설위원

변기 시트 문제는 경제적·위생적 접근이 아닌 제3의 방식도 가능하다. ‘함께’라는 공존의 자세로 대상을 바라보는 것이다. 타자의 처지에서 소통하고 공감한다면 남성이 서서 오줌을 누는 일은 없을 것이다. 위생은 말할 것도 없고 가정의 평화가 찾아온다.

함께의 자세는 정치인이 가져야 할 필수 덕목이다. 고대 로마의 역사가 플루타르코스는 “군주가 국민의 뜻만 추종하면 그들과 같이 망하고 국민의 뜻을 거스르면 그들 손에 망한다”고 했다. 국민의 뜻에 맹종하는 포퓰리즘이나 그에 역행하는 독재는 똑같이 위험하다. ‘빨리 가려면 혼자 가라.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는 아프리카 격언처럼 국민과 어깨를 겯고 함께 가야 한다.

중국 한나라 문제에게 어떤 사람이 천리마를 선물하려 했다. 황제가 뿌리치며 말했다. “나는 민심을 살피고자 순행할 때 하루에 30리를 달렸고, 전쟁에서 적과 싸울 때 하루에 50리를 달렸다. 또 내가 수레를 타고 갈 때는 모든 수레가 내 뒤를 따랐다. 나에게 천리마가 있어 하루에 천 리를 달리면 혼자 어디를 갈 수 있겠는가.”

‘문경지치’의 태평성대를 연 한 문제의 ‘함께 정치’는 우리의 거울로도 손색이 없다. 4·7 재보선에서 집권여당이 완패한 것도 국민과 함께 하지 않은 잘못이 크기 때문이다. 더불어민주당은 국민과 ‘더불어’ 가지 않았다. 문재인 대통령은 국민 모두의 손을 맞잡고 가겠다던 취임사의 약속을 저버렸다. 이들은 180석 의석만 믿고 거침없이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 제멋대로 법을 만들고 반칙과 내로남불을 일삼았다. 궤도를 이탈한 기관차의 폭주가 천리마보다 빨랐지만 브레이크는 작동하지 않았다. 그렇게 질주하다 뒤집어진 게 선거 패인의 본질이다.

여권의 일탈은 온갖 부조리를 양산했다. 온 나라에 오줌 방울이 튀고 지린내가 진동했다. 영국 정치가 액튼 경이 경고했듯이 절대 권력은 절대적으로 부패할 수밖에 없다. 이런 폐단을 막기 위해 만든 것이 삼권분립이라는 제동장치다. 삼권의 어느 하나가 권력을 휘두르면 나머지 둘이 견제하라는 취지다. 권력의 독주는 이런 민주시스템이 완전히 망가졌다는 뜻이다. 이것을 어떻게 민주주의로 부를 수 있나.

재보선의 심판은 폭주 기관차를 잠시 멈춰 세운 수준에 불과하다. 민주적 장치를 되살리는 단계에는 아직 이르지 못했다. 폭주의 엔진과 고장 난 브레이크도 그대로인 상태다. 이해찬 전 민주당 대표는 “위에는 맑아지기 시작했는데 바닥에 가면 잘못된 관행이 많이 남아 있다”면서 “그런 것까지 고치려면 재집권해야 한다”고 했다. 이런 해괴한 논리로 국민을 속이는 일들은 내년 대선을 앞두고 더욱 기승을 부릴 것이다. 달콤한 말에 속아선 안 된다. 사람을 믿지 말고 제도를 믿어야 한다. 절대 권력을 쪼개 삼권분립을 복원하는 일이 무엇보다 화급하다.

권력 농단의 상처는 이미 깊고 크다. 천리마의 위험한 질주로 대한민국이 파탄 나는 사태를 방관할 순 없다. 교만한 말을 바꾸고 못된 기수를 교체해야 한다. 주권자의 당연한 권리이자 의무다.

 

배연국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