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중 관계에서 중국 아편 수출에 대한 오해가 하나 있다. 당시 중국에 주재하던 미국인 모두가 이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사육한 것은 아니었다. 이를 죽이려 드는 미국인들도 적지 않았으나 관심을 끌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이들이 실제로 아편무역을 차단할 수 있는 방도가 적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중국 정부의 명을 받들고 중국 흡연자의 금연과 미국 상인의 판매금지를 촉구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열강 제국의 주재원들 중 그나마 미국인들의 아편 판매가 두드러진 것은 선교사들 때문이다. 당시 유럽 열강은 정종(政宗)일체의 체계를 유지했었다. 이들 나라의 선교사들의 종교 목표는 정치와 일치했다는 의미다. 미국인 선교사들만은 달랐다. 이들은 ‘중국을 병든 나라’로 보고 이를 치유해야 하는 사명감에 차 있었다.
미국 선교사들의 아편 반대 목소리는 1830년대부터 커졌다. 개신교 선교사들이 광동성으로 이주를 시작한 시기였다. 그러나 상인들과의 마찰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이들 간의 갈등은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았다. 결국 미국 무역상들은 중국의 아편 수입금지에 협조할 것을 선언하고 임칙서와 아편수입금지 서약서에 서명했다.
이를 이끌어내는 데 중국의 무역상 계층인 ‘호관(浩官)’의 압박도 효과가 있었다. 중국 대외무역상인으로 부를 축적한 이들은 이른바 ‘큰손’이었다. 이들은 미국이 아편무역을 중단하지 않으면 호관들이 미국과의 거래를 끊겠다고 으름장을 놨다.
아편무역 반대에 앞장선 대표적인 미국인들로 상인 찰스 킹(Charles W. King)과 선교사 엘리아 브리즈먼(Elijah Bridgman) 등이 있었다. 킹은 아편무역을 거부했던 대표적인 상인이었다. 브리즈먼은 중국의 첫 아편 화형식(1839년 6월)에 초대받은 유일한 외국인이었다.
이 의식을 진행한 이가 임칙서 양광(광주성과 광서성을 모두 관할하는) 총독이었다. 그는 아편과의 전쟁이라는 특명을 받고 부임했다. 19세기의 미국 상인과 선교사들 간의 논쟁은 오늘날까지도 그 해답을 찾지 못하고 있다. 이익과 중국의 변화 중 무엇을 우선시해야 하는지를 두고 논쟁은 끊이지 않는다.
주재우 경희대 교수·국제정치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