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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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부 배상책임’ 인정 안 해… 국내 日자산 강제집행 제동도 [위안부 피해자 2차 소송 각하]

석달 만에 바뀐 판결
재판부 달라지자 “인권침해 예외 없다”
‘주권적 행위’ 판단에도 法적용 엇갈려
“국가면제 범위는 정책결정 선행돼야”
법원 해석에 조심스러운 입장 드러내
법조계 “결국 대법원에서 정리해줘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 할머니가 21일 서울 서초구 중앙지방법원에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국내 법원에 제기한 두 번째 손해배상 청구 소송 선고 공판이 끝난 뒤 판결에 대한 입장을 밝히고 있다. 이재문 기자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낸 두 번째 손해배상 소송에서는 첫 번째 소송 때와 달리 피해자들이 사실상 패소하면서 위안부 문제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사법부를 통한 위안부 피해 할머니 개개인에 대한 구제가 일시정지될 뿐 아니라 지난 1월 손해배상 판결을 받아 국내 일본자산의 강제집행을 준비하던 다른 위안부 피해 할머니 측 계획에도 차질이 생길 것으로 보인다.

위안부 피해자들이 낸 1·2차 손해배상 소송의 결론을 가른 결정적 요인은 국가면제 원칙 적용 여부였다.

서울중앙지법 민사15부(재판장 민성철)가 21일 각하 결정을 한 것은 국가면제 원칙을 위안부 사건에도 적용해야 한다고 봤기 때문이다. 재판부는 “대한민국은 미국·영국 등과 같이 국가면제를 인정할 범위를 법률로 제정하지 않았다”며 “국가면제 인정 여부에 관한 기준을 제시하는 규범은 오로지 국제관습법”이라고 전제했다. 이어 “국제관습법은 외국의 비주권적 행위에 대해서는 국가면제를 인정하지 않고 주권적 행위에 대해선 국가면제를 인정하는 제한적 면제론을 채택하고 있다”며 “당시 일본이 저지른 행위는 위법한 주권행사이기 때문에 주권적 행위로서의 지위를 상실한 것이 아니다”고 밝혔다. 이 같은 판단은 지난 1월 원고 승소로 판결한 서울중앙지법 민사34부(당시 재판장 김정곤)의 판단과 엇갈린다. 당시 재판부는 “비록 이 사건 행위가 국가의 주권적 행위라고 할지라도 국가면제를 적용할 수 없고, 예외적으로 대한민국 법원에 피고에 대한 재판권이 있다”고 천명했다. 위안부 제도를 일본 정부의 주권적 행위라고 본 점은 같았지만, 법 적용에서 갈린 셈이다.

2차 소송 재판부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에 의한 강제 노역이나 민간인 살해 피해자들이 전쟁 후 각자 자국 법원에 소송을 냈지만 인정되지 않았던 사례도 곁들였다. 당시 이탈리아와 그리스 법원만 원고의 청구를 받아들였으나 국제사법재판소(ICJ)에서 국가면제를 이유로 결과가 뒤집어졌다.

재판부는 또 “심각하게 인권을 침해했다고 인정된다고 해도, 그 요건이 갖는 불명확성으로 향후 국가면제 인정 범위에 불확실성을 초래할 수 있다”며 법원이 국가면제 적용 범위를 해석하는 것에도 조심스러운 입장을 드러냈다.

재판부는 “(국가면제 적용 범위는) 행정부와 입법부의 정책 결정이 선행돼야 한다”며 “이런 의사 결정이 없는 상황에서 법원이 추상적 기준만 제시해 예외를 만드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설명했다.

 

국가면제 적용 범위를 재판부가 판단하게 될 경우 향후 그 적용 여부를 둘러싸고 제각각 들쭉날쭉한 판단이 나오고, 외교적 논란 등 국익에도 부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위안부 강제 동원이 민간인 업체를 통한 상업적 행위가 아닌 일본 정부의 공권력 행사라는 점도 판단의 근거가 됐다.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례에 따르면 사법(私法·개인 사이 관계를 규정한 법)적인 행위에 대해서는 국가면제가 적용되지 않는다. 이 때문에 피해자들은 일본 정부의 위안부 동원이 주권 행위가 아닌 상업 행위, 즉 사법적 행위라고 주장해왔다. 이에 재판부는 “피고(일본)는 군의 요청에 따라 총독부 행정조직을 이용해 경찰 등의 협조를 받아 피해자를 차출하고 군 위안소에 배치해 성관계를 강요했다”며 “전형적인 공권력 행사라 상업적인 행위로 볼 수 없다”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21일 오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 앞에서 이상희 변호사가 입장을 말하고 있다. 연합뉴스

위안부 피해 할머니 측을 대리한 이상희 변호사(법무법인 지향)는 이날 재판부가 ‘한·일 위안부 합의’가 피해자들의 권리 구제 수단이라고 본 데 대해 “헌법재판소에서도 2015년 한·일 합의가 법적인 권리 절차가 될 수 없다고 분명히 명시했는데 반하는 결정이 나왔다”며 “한·일 합의를 권리구제 절차로 본 것은 도저히 저희가 납득하기 어렵다”고 반박했다.

피해 할머니 측이 항소할 것으로 보이는 가운데 결국 대법원이 국가면제 원칙과 관련해 최종 정리를 해줘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부장판사 출신의 여상원 변호사는 “(국가면제 원칙 적용 여부는) 결국 법률 해석에 관한 문제”라며 “대법원에서 정리를 해줘야 한다”고 했다.

 

이희진 기자 heejin@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