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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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땐 '승소' 2차 땐 '각하'… 엇갈린 위안부 피해자 손배소 판결

1차 소송 승소 석달 만에 상반된 판결
“국제관습법 부정하면 日과 외교 충돌”
2015년 한·일 합의도 권리구제 역할
이용수 할머니 “황당… ICJ까지 갈것”

2차 재판부는 “日 배상책임 인정 안 해”
‘주권적 행위’ 판단에도 法적용 엇갈려
“국가면제 범위는 정책결정 선행돼야”
법원 해석에 조심스러운 입장 드러내
국내 日자산 강제집행도 제동 걸릴 듯
법조계 “결국 대법원에서 정리해줘야”
서울 종로구 옛 주한일본대사관 앞 소녀상. 연합뉴스

일제강점기 일본군에 끌려가 성폭력 등 온갖 고초를 겪은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두 번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각하’ 판단을 받았다. 올 초 다른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이 낸 소송을 맡은 같은 법원의 다른 재판부가 피해자들 손을 들어준 것과 정반대 판결이다. ‘국가면제’(주권국의 타국 재판권 면제)에 대한 시각차가 엇갈린 판결로 이어졌다.

 

서울중앙지법 민사15부(재판장 민성철)는 21일 고(故) 곽예남·김복동 할머니와 이용수 할머니 등 위안부 피해자와 유족 20명이 일본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각하했다. 각하는 소송 요건을 갖추지 못한 경우 본안을 심리하지 않고 내리는 결정이다.

 

재판부는 위안부 사건의 경우 국가면제 원칙이 인정된다고 봤다. 그러면서 2차 세계대전 후 독일을 상대로 유럽 여러 나라 피해자들이 낸 소송이 각하된 사례를 들었다. 재판부는 “이탈리아와 그리스를 제외한 프랑스, 슬로베니아, 폴란드, 벨기에, 브라질 법원은 모두 독일에게 국가면제를 인정했다”며 “현재 국제관습법과 달리 일본에 대해 국가면제를 부정하면 판결 선고 및 그 이후의 강제집행 과정에서 일본과의 외교관계 충돌이 불가피하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2015년 이뤄진 한·일 합의가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에게 권리구제 수단으로서 역할도 한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한·일 합의에는 상대방이 있기 때문에 대한민국의 입장만 일방적으로 반영할 수 없다”며 “비록 합의안에 대해 피해자들의 동의를 얻지는 않았지만, 피해자의 의견을 수렴하는 절차는 거쳤고 일부 피해자는 화해·치유재단에서 현금을 수령했다”고 말했다.

 

재판부는 각하 판단을 내리면서도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피해 회복이 미흡한 점은 인정했다.

 

앞서 지난 1월 같은 법원 민사합의34부(당시 김정곤 부장판사)는 고 배춘희 할머니 등 위안부 피해자 12명이 같은 취지로 제기한 소송을 원고 승소로 판결했다. 당시 재판부는 “국가가 반인권적 행위로 피해자들에게 극심한 피해를 줬을 경우까지도 재판권이 면제된다고 해석하는 것은 불합리하다”며 국가면제를 적용하지 않았다.

 

이날 판결 결과를 보러 직접 법원에 온 이용수 할머니는 선고를 다 듣지 않고 법정을 떠났다. 이용수 할머니는 판결이 끝난 뒤 “너무 황당하다. 재판이 잘 나왔든 못 나왔든 간에 국제사법재판소까지 간다”며 계속해서 싸우겠다는 의지를 피력했다.

◆국제관습법 해석 달라… 법원 “위안부 문제 외교로 풀어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낸 두 번째 손해배상 소송에서는 첫 번째 소송 때와 달리 피해자들이 사실상 패소하면서 위안부 문제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사법부를 통한 위안부 피해 할머니 개개인에 대한 구제가 일시정지될 뿐 아니라 지난 1월 손해배상 판결을 받아 국내 일본자산의 강제집행을 준비하던 다른 위안부 피해 할머니 측 계획에도 차질이 생길 것으로 보인다.

 

위안부 피해자들이 낸 1·2차 손해배상 소송의 결론을 가른 결정적 요인은 국가면제 원칙 적용 여부였다.

 

서울중앙지법 민사15부(재판장 민성철)가 21일 각하 결정을 한 것은 국가면제 원칙을 위안부 사건에도 적용해야 한다고 봤기 때문이다. 재판부는 “대한민국은 미국·영국 등과 같이 국가면제를 인정할 범위를 법률로 제정하지 않았다”며 “국가면제 인정 여부에 관한 기준을 제시하는 규범은 오로지 국제관습법”이라고 전제했다. 이어 “국제관습법은 외국의 비주권적 행위에 대해서는 국가면제를 인정하지 않고 주권적 행위에 대해선 국가면제를 인정하는 제한적 면제론을 채택하고 있다”며 “당시 일본이 저지른 행위는 위법한 주권행사이기 때문에 주권적 행위로서의 지위를 상실한 것이 아니다”고 밝혔다. 이 같은 판단은 지난 1월 원고 승소로 판결한 서울중앙지법 민사34부(당시 재판장 김정곤)의 판단과 엇갈린다. 당시 재판부는 “비록 이 사건 행위가 국가의 주권적 행위라고 할지라도 국가면제를 적용할 수 없고, 예외적으로 대한민국 법원에 피고에 대한 재판권이 있다”고 천명했다. 위안부 제도를 일본 정부의 주권적 행위라고 본 점은 같았지만, 법 적용에서 갈린 셈이다.

 

2차 소송 재판부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에 의한 강제 노역이나 민간인 살해 피해자들이 전쟁 후 각자 자국 법원에 소송을 냈지만 인정되지 않았던 사례도 곁들였다. 당시 이탈리아와 그리스 법원만 원고의 청구를 받아들였으나 국제사법재판소(ICJ)에서 국가면제를 이유로 결과가 뒤집어졌다.

 

재판부는 또 “심각하게 인권을 침해했다고 인정된다고 해도, 그 요건이 갖는 불명확성으로 향후 국가면제 인정 범위에 불확실성을 초래할 수 있다”며 법원이 국가면제 적용 범위를 해석하는 것에도 조심스러운 입장을 드러냈다.

 

재판부가 “(국가면제 적용 범위는) 행정부와 입법부의 정책 결정이 선행돼야 한다”고 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국가면제 적용 범위를 재판부가 판단하게 될 경우 향후 그 적용 여부를 둘러싸고 제각각 들쭉날쭉한 판단이 나오고, 외교적 논란 등 국익에도 부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재판부는 그러면서 “피해 회복 등 위안부 문제 해결은 외교적 교섭을 포함한 노력에 의해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21일 오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 앞에서 이상희 변호사가 입장을 말하고 있다. 연합뉴스

위안부 강제 동원이 민간인 업체를 통한 상업적 행위가 아닌 일본 정부의 공권력 행사라는 점도 판단의 근거가 됐다.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례에 따르면 사법(私法·개인 사이 관계를 규정한 법)적인 행위에 대해서는 국가면제가 적용되지 않는다. 이 때문에 피해자들은 일본 정부의 위안부 동원이 주권 행위가 아닌 상업 행위, 즉 사법적 행위라고 주장해왔다. 이에 재판부는 “피고(일본)는 군의 요청에 따라 총독부 행정조직을 이용해 경찰 등의 협조를 받아 피해자를 차출하고 군 위안소에 배치해 성관계를 강요했다”며 “전형적인 공권력 행사라 상업적인 행위로 볼 수 없다”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위안부 피해 할머니 측을 대리한 이상희 변호사(법무법인 지향)는 이날 재판부가 ‘한·일 위안부 합의’가 피해자들의 권리 구제 수단이라고 본 데 대해 “헌법재판소에서도 2015년 한·일 합의가 법적인 권리 절차가 될 수 없다고 분명히 명시했는데 반하는 결정이 나왔다”며 “한·일 합의를 권리구제 절차로 본 것은 도저히 저희가 납득하기 어렵다”고 반박했다.

 

피해 할머니 측이 항소할 것으로 보이는 가운데 결국 대법원이 국가면제 원칙과 관련해 최종 정리를 해줘야 한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부장판사 출신의 여상원 변호사는 “(국가면제 원칙 적용 여부는) 결국 법률 해석에 관한 문제”라며 “대법원에서 정리를 해줘야 한다”고 했다.

가토 가쓰노부 일본 관방장관. 교도=연합뉴스

◆정부 “피해자 중심 원칙 따라 노력” 日선 “지극히 타당한 판결” 반색

 

21일 법원이 고(故) 곽예남·김복동 할머니와 이용수 할머니 등 위안부 피해 할머니 등 20명이 일본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 1심에서 각하 판단을 내린 데 대해 외교 당국은 구체적 언급을 자제했다. 일본 정부는 공식적으로는 신중함을 유지하면서도 반색하는 분위기다.

 

정부는 국내 법원이 이날 판결에 입장 표명을 자제했다. 외교부 당국자는 “판결 관련 상세 내용을 파악 중인바, 구체 언급은 자제코자 한다”며 “다만 정부는 피해자 중심주의 원칙에 따라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명예와 존엄을 회복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노력을 다해 나갈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는 세계에서 유례없는 전시 여성의 인권유린이자 보편적 인권 침해의 문제”라며 “일본 정부가 1993년 고노담화 및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 등에서 스스로 표명했던 책임통감과 사죄, 반성의 정신에 부합하는 행보를 보일 것을 촉구한다”고 밝혔다.

 

일본 정부 대변인 가토 가쓰노부(加藤勝信) 관방장관은 정례 브리핑에서 “주권면제에 대한 일본 입장에 근거한 것이라면 적절하다”며 “판결 내용을 입수해 정밀 분석할 필요가 있다. 개별적 논평은 삼가겠다”고 밝혔다.

 

NHK에 따르면 외무성 간부는 취재진에게 “판결 내용을 정밀분석해 봐야겠지만 일본 정부 입장에 따른 형태로 판결이 나왔다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다른 외무성 간부는 “이전 판결이 이상한 판결이었지 (이번 판결은) 극히 보통의 타당한 판결”이라고 주장했다.

 

이번 재판부 판단이 지난 2년여 악화일로를 걸어온 한·일관계에 미칠 영향은 크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정부 내부적으로도 이번 판결이 1심인 데다 지난 8일 배춘희 할머니 사건에서는 원고 승소 판결이 나왔고, 일본과의 관계는 강제동원 대법원 판결, 일본의 수출규제 문제 등으로 훨씬 더 복잡하게 꼬여 있다는 인식을 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1월 신년 기자회견에서 “(갈등을) 외교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 양국이 여러 차원의 대화를 하고 노력을 하는 중 위안부 판결 문제가 더해져서 솔직히 조금 곤혹스러운 것이 사실”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일부에서는 판결이 엇갈리면서 오히려 정부의 대응이 더 어려워졌다는 지적도 나온다.

 

일본 정부는 1965년 한·일 청구권협정과 2015년 12·28 한·일 위안부 합의로 이 문제가 완전히 해결됐다는 입장을 견지하며 한국 정부와 여론을 압박할 것으로 보인다. 외무성 관계자는 이번 판결이 한·일관계에 플러스가 되느냐는 질문에 “천만의 말씀”이라며 “일·한관계는 최악의 마이너스 상태”라고 말했다고 NHK가 전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 할머니가 21일 서울 서초구 중앙지방법원에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국내 법원에 제기한 두 번째 손해배상 청구 소송 선고 공판이 끝난 뒤 판결에 대한 입장을 밝히고 있다. 이재문 기자

◆ICJ 회부 가능성 희박… 승소도 장담 못 해

 

“한국 법원을 노골적으로 무시하는 일본 정부 태도가 계속된다면 국제사법재판소(ICJ)에서 사법적 판단을 받자.”

 

21일 일본 정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이 서울중앙지법에서 각하되자 원고로 참여한 이용수 할머니는 재차 ICJ 제소를 주장했다. 이 할머니의 간절함과 달리 한·일 양국 정부가 위안부 문제를 ICJ에 회부할 가능성은 희박하다. 우여곡절 끝에 재판이 열려도 승소를 장담할 수 없다. 다만 재판 과정에서 위안부 문제를 국제사회에 알리는 것만으로도 한국으로서는 수확이 클 것으로 예상된다.

 

일단 위안부 문제가 ICJ의 판단을 받기까지 난관이 많다. ICJ 재판은 분쟁 당사국들이 모두 동의해야 열린다. 양국이 사전에 ICJ의 강제관할권을 수락했다면 한 쪽의 제소로도 열릴 수 있으나, 한국과 일본은 이에 해당하지 않는다. 게다가 양국 정부 모두 ICJ행에 소극적인 상황이다.

 

재판 결과를 두고는 전망이 엇갈린다. 패소를 점치는 이들은 ‘페리니 판례’를 든다. ICJ는 2012년 국가면제(한 국가의 법원이 타국의 주권 행위를 재판할 수 없음)를 이유로 독일 정부의 손을 들어줬다.

 

반면 위안부와 페리니 사건은 근본적으로 달라 승소할 수 있다는 견해도 있다. 최승환 경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페리니는 이탈리아 군속이 포로가 돼 강제노역한 것으로 전시에 일반적인 관행이었기에 위안부와 경우가 다르다”고 지적했다.

 

이희진·이정한·홍주형 기자, 도쿄=김청중 특파원, 송은아 기자  heejin@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