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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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병주의역사유적탐방] 신사임당과 이이의 공간, 오죽헌

신사임당과 이이의 생가 오죽헌.

오늘은 어버이날이다. 역사 속에서 가장 모범적인 어버이와 자식의 관계라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이 신사임당(1504~1551)과 율곡 이이(1536~1584)이다. 두 사람은 5만원과 5천원권 지폐의 주인공으로 등장하여 한국을 대표하는 인물로 기억이 되기도 한다.

1536년 신사임당은 이원수와의 사이에서 다섯째인 아들 이이를 낳았다. 출생지는 강릉 오죽헌. 오죽헌은 ‘검은 대나무로 둘러싸인 집’이라는 뜻이다. 이이가 태어날 때 용꿈을 꾸었다고 하여, 어릴 때의 이름은 현룡(見龍)이었으며, 그가 태어난 방은 몽룡실(夢龍室)로 불렸다. 오죽헌은 신사임당이 아버지 신명화로부터 물려받은 친정집이었다.

조선 전기까지는 여성이 남성과 거의 동등한 대우를 받았다. 재산 상속에서도 남녀가 똑같이 재산을 물려받았으며, 혼인에서는 처가살이가 관행적으로 행해졌다. 이이의 아버지 이원수도 처가살이하면서 이이를 낳은 것이다. 따라서 오죽헌은 신사임당과 더 많은 인연을 가진 유적지이기도 하다.

강릉 외가에서 자라던 이이는 여섯 살 때 서울로 올라왔는데, 집은 수진방(현재의 종로구 청진동 일대)에 있었다. 서울로 온 신사임당은 항상 홀어머니를 그리며 눈물을 흘리는 일이 많았고, 수시로 강릉으로 와서 어머니를 봉양했다.

이이에게 있어서 존재 그 자체이기도 했던 어머니의 죽음은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충격 속에 이이는 성리학이 지배 이념인 조선시대에 집을 나가 금강산으로 들어가 불교에 빠졌다. ‘선조실록’에도 “어머니를 여의고 망령되이 슬픔을 잊고자 불교를 탐독하여 거의 1년이 되도록 불교에 종사하였습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이는 곧 불교의 허망함을 깨닫고 다시 유학자의 길로 들어가 조선 최고의 유학자가 되었다.

신사임당과 이이의 삶의 행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강릉 오죽헌에는 보물로 지정된 오죽헌 건물과 함께 이이를 모신 사당인 문성사, 율곡기념관, 신사임당 초충도 화단 등의 유적이 있다.

신병주 건국대 교수·사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