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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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콕’ 생활 지혜… 슬기로운 ‘책콕’ [S 스토리]

팬데믹시대 독서의 즐거움 재발견

美 출판사 CEO “2020년 최고의 한 해”

‘코로나 블루’ 치유 스트레스 관리서 인기
봉쇄기간 요리·가드닝 등 취미서도 열풍
휴교 조치로 홈스쿨링 도서도 많이 팔려
한국도 대형서점 매출 전년比 17% 급증

베스트셀러·온라인 쏠림은 과제

美 오프라인 서점 매출 30% 가까이 급락
책 직접 고를 기회 줄어 검증된 것만 찾아
美 소설 판매 톱 10 중 9권 기성작가 작품
업계 ‘빈익빈 부익부’… 신예 등용문 좁아져

웹툰·웹소설 공급 9개사 매출 1년 새 34%↑
서적 온라인 거래액도 31% 늘어 2조4150억

코로나19 대유행은 일상의 많은 부분을 뒤흔들었다. 이동 제한, 비필수 상점·사업장 운영 중단 등 봉쇄(Lockdown) 기간이 길었던 미국과 유럽에서 특히 그랬다. 많은 사람이 집에 갇혀 지내고 콘서트·영화·스포츠 관람 등에 제약이 생기면서 넷플릭스 등을 이용한 ‘안방극장’이 활성화했다. ‘랜선 여행’, ‘방구석 콘서트’ 같은 온라인 간접체험 방식의 여가생활도 서서히 확산했다.

 

그리고 “많은 사람이 독서에 대한 애정을 재발견했다.”(스티븐 로팅가 영국 출판협회장)

 

적어도 사람들은 책을 더 많이 구매했다. 글로벌 시장조사업체 NPD에 따르면 미국에서는 종이책과 전자책을 합쳐 전년 대비 9% 증가한 9억4200만권의 도서가 팔렸다. NPD의 관련 조사가 시작된 2004년 이후 최고 성적이다. 종이책만 놓고 보면 2019년보다 8.2% 늘어난 7억5100만권이 팔렸다. 전자책이 의미 있는 비중으로 팔리기 시작한 직전 해인 2009년 이후 최대 판매량이다. 미국 펭귄랜덤하우스 출판사의 매들린 매킨토시 최고경영자(CEO)는 지난해 말 뉴욕타임스(NYT)에 “매우 오랜만에 찾아온 최고의 한 해였다”고 말했다.

 

지난해 출판물 매출은 영국도 2%, 일본도 4.3% 각각 증가했다. 한국의 온·오프라인 주요 서점 매출액도 17.4% 늘었다.

 

출판업은 종종 ‘불황을 타지 않는’, ‘회복 탄력성이 강한’ 산업으로 묘사된다. 상대적으로 적은 비용을 들여 즐길 수 있는 문화생활이기 때문이다. 이는 사상 초유의 감염병 위기로 대공황 이후 최악의 경기침체 우려가 고조됐던 지난해 사실로 입증됐다. 각국 봉쇄령이 시작된 3월을 전후로 주춤했던 도서 판매량은 6월쯤부터 증가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여가생활의 하나로, 집콕 생활의 지혜를 찾아서, 코로나 블루에서 벗어나려고, 또는 현실 도피를 위해 책을 찾았다. 미국 작가 아일린 굿지의 에이전트 폴라 뮈니에는 ABC방송에 “어려운 시기에 좋은 책보다 위로가 되는 것은 없다”며 “몇 년 동안 책을 읽지 않았던 사람들이 다시 독서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스눕독이 출판사를 살렸다”

 

크리스틴 매클레인 NPD 분석가는 “갑자기 아이들을 집에서 교육해야 할 필요성이 생기면서부터 과열된 정치에 이르기까지, 도서 판매 증가는 파도처럼 찾아왔다”며 지난해 미국 출판시장을 돌아봤다.

 

코로나19가 미친 충격파가 비슷했던 만큼 지난해 각국의 도서 구입 경향도 일정 부분 유사성을 보였다. 봄에는 학습 도서가 많이 팔렸다. 봉쇄조치로 학교가 문을 닫은 상황에서 아이들을 마냥 놀게 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대신 교재 판매량은 대폭 감소했다.

 

‘나’를 위한 책도 인기를 끌었다. 혹시 내가 감염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불안감, 집콕 생활이 길어진 데서 오는 스트레스 등의 치유법을 책에서 찾으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 타라 브랙의 ‘끌어안음: 외로움·상처·두려움과 당당히 마주하기’ 같은 이른바 ‘셀프 헬프(Self Help·자조)’ 도서는 지난해 5월1일∼8월1일 13주 동안 미국 내 매출이 전년 동기 대비 22% 상승했다고 NPD는 전했다.

‘소년과 두더지와 여우와 말’은 일러스트레이터 찰리 매커시가 용기를 주제로 그린 그림을 소셜미디어에 올렸다가 중증장애 치료 병원, 청소년 학교, 군대 내 외상후스트레스 치료센터 등에서 사용 문의가 잇따르자 출간에 이르게 됐다. 이 책은 영어권 독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닐슨이 집계한 2020년 영국 베스트셀러에서 1위, NPD 집계 미국 베스트셀러에서는 10위에 이름을 올렸다.

 

대중도서 판매량도 늘었다. 지난해 미국 도서 매출 증가의 3분의 1은 청소년 소설이 견인했다. 2019년보다 11%(약 1800만권)가 더 팔렸다. 특히 판타지소설 ‘트와일라잇’의 완결판 ‘미드나잇 선’이 미국 베스트셀러 2위를 차지했다. 영국에서는 리처드 오스먼의 ‘목요일의 살인 클럽’ 등 소설 판매량이 2019년보다 16% 증가했다.

 

요리, 정원 가꾸기, DIY(Do It Yourself·스스로 만들기) 관련 도서 매출도 증가했다. 미국 출판사 크로니클 북스는 지난해 봄 전역의 서점이 문을 닫으면서 동반 위기에 처했으나, 래퍼 스눕 독이 뜻밖의 구세주가 돼 주었다고 NYT는 전했다. 스눕 독이 2년 전에 쓴 요리책이 불티나게 팔려나간 것이다. 50가지 레시피를 담은 이 책은 지난해에만 20만5000부 팔렸다. 2019년 판매량의 2배에 가까웠다. 크로니클 북스는 그 덕에 적자를 면할 수 있었다.

국내 흐름도 비슷했다. 이서윤의 ‘더 해빙’(교보문고 베스트셀러 1위) 등 자기계발서와 손원평의 ‘아몬드’(〃 3위) 등 청소년소설이 인기를 끌었고 취미 관련 책은 전년보다 62.3% 더 팔렸다. 코로나19 불황에 맞서 돈의 흐름을 잡기 위한 자산관리, 투자, 미래예측 책이 베스트셀러 상위권에 포진한 것은 해외 출판시장과 구분되는 한국만의 특징이었다.

 

반면 미국에서는 인종·정치 관련 도서가 약진했다. 조지 플로이드 사망 사건이 촉발한 인종차별 반대 시위와 11월 대선의 영향으로 풀이된다. 사이먼앤드슈스터 출판사는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을 표적으로 한 책을 줄줄이 내놔 성공을 거뒀다. 이 가운데 트럼프의 조카 메리가 쓴 ‘너무 과한데 만족을 모르는’은 발간 첫 주에만 135만부가 팔리더니 2020년 베스트셀러 4위까지 올랐다.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의 회고록 ‘약속의 땅’은 지난해 11월 출간됐는데도 베스트셀러 1위 자리를 움켜쥐었다.

 

일본에서는 만화 단행본 판매량이 크게(24.0%) 늘었다. 특히 ‘귀멸의 칼날’ 시리즈의 폭발적 인기가 책 판매량 증가를 주도했다고 니폰닷컴이 보도했다.

◆코로나19 대유행 시대 출판시장의 이면

 

크로니클 북스를 재정난에서 구한 스눕 독의 요리책은 지난해 등장한 추세 중 세 가지를 반영한다. ‘유명 저자’가 ‘집’에서 할 수 있는 일에 관해 쓴 ‘구간(舊刊)’이라는 점이다. 반대로 말하면, 신예이거나 덜 유명한 작가가 새로 내놓은 책은 독자에게 다가가기가 대단히 어려운 한 해였다는 뜻이다.

 

이는 각 지역의 서점이 봉쇄기간 문을 닫은 데 상당 부분 기인한다. 사람들은 월마트 같은 대형마트나 온라인에서 책을 샀다. 온라인 도서 구매는 예전부터 형성된 흐름이었지만 코로나19 대유행 시대에 더욱 속도가 붙었다. 편리할 뿐 아니라 바이러스로부터 더 안전한 방식이라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서가를 둘러보다 우연히 좋은 책을 발견하는 즐거움을 누릴 기회는 자연스레 줄었다. 독자들 시선은 검증된 도서, 그러니까 저명한 작가가 쓴 책이나 스테디셀러에 주로 쏠렸다. 지난해 소설 분야 베스트셀러 10권 중 9권이 기성 작가, 베스트셀러 작가가 쓴 책이라고 NPD 북스캔은 밝혔다. 예를 들어 2018년 출간된 델리아 오언스의 소설 ‘가재가 노래하는 곳’은 미국과 영국의 지난해 베스트셀러 목록에도 나란히 이름을 올렸다.

미국의 전체 도서 판매에서 구간이 차지하는 비중은 2010년 50%가량에서 지난해 3분의 2가량으로 늘었으며, 지난해 미국 출판사들이 발간한 책 가운데 98%가량은 5000부도 채 안 팔렸다고 NYT는 전했다.

 

출판사들은 각 지역 오프라인 서점들의 지속가능성을 우려하기 시작했다. 미국 인구조사국에 따르면 지난해 서점 매출은 30% 가까이 줄었다. 특히 주요 수입원이었던 ‘저자와의 대화’ 행사가 화상회의 방식으로 바뀐 것이 큰 요인이 됐다. 전국 각지에서 더 많은 독자가 참여하게 됐지만, 굳이 행사 주최 서점에서 책을 사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출판사들은 행사를 여는 서점에 현금 지원을 시작했다.

 

도서 판매량이 늘었다는 사실이 반드시 독서 문화의 확산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봉쇄기간 도서관도 상당수 문을 닫았기 때문이다. 국립중앙도서관이 전국 1180개 공공도서관 대출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 지난해 1∼11월 대출량은 2019년 대비 45.9%나 감소했다. 도서 대출은 2월 신천지발(發), 5월 이태원발, 8월 광화문 집회발 등 감염 확산 직후마다 크게 준 것으로 나타났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 '온택트' 힘입어 韓 전자책 플랫폼기업 급성장

 

코로나19 파장은 국내 출판시장에도 찾아왔다. 지난해 사회적 거리두기 등으로 비대면 활동이 일상화하면서 온라인 서점 이용률이 증가하고, 전자책·오디오북이 비약적으로 성장하는 등 도서 소비 패턴의 구조적 변화가 한층 빨라진 모양새다.

 

대한출판문화협회가 최근 발간한 ‘2020년 출판시장 통계’에 따르면 온·오프라인 주요 서점(교보문고, 예스24, 알라딘)의 2020년 매출액 총계는 약 1조7366억원으로 전년 대비 17.4%(약 2577억원) 늘었다. 서점 총 매출액 증가는 온라인 매출 부문이 약진했기 때문이다. 교보문고의 2020년 온라인 부문 매출액은 전년 대비 30.3% 늘어 오프라인 부문 매출액이 전년 대비 0.7% 증가에 그친 것과는 큰 차이를 보였다.

 

온라인 매출 강세는 서적 부문 온라인쇼핑 거래액 추이에서도 확인된다. 통계청에 따르면 2020년 서적류 온라인 거래액은 약 2조4150억원으로 전년(1조8466억원)보다 30.8% 증가했다. 특히 국내에서 코로나19 집단감염 등 확산세로 위기의식이 고조됐던 지난해 3∼4월 사이 급증한 것으로 확인돼 코로나19 확산에 따른 온라인 쇼핑 확대가 도서 부문에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나타났다.

 

카카오엔터테인먼트, 리디, 밀리의서재 등 전자책·오디오북 플랫폼 기업의 성장도 눈에 띈다. 2020년 주요 전자책(웹툰·웹소설) 플랫폼 기업(9개사)의 총 매출액은 약 7492억원으로 전년 대비 33.9% 급증했다. 전자책 플랫폼이 커지자 웹툰·웹소설 출판시장도 수혜를 봤다. 주요 웹툰·웹소설 출판사(5개사)의 2020년 총 매출액은 약 1487억원으로 전년에 비해 17.3% 늘었다.

 

한편 상위 78개 출판 기업의 2020년 총 매출액은 4조8080억원으로 전년 대비 4.1%(약 2062억원) 감소했다. 국내 출판시장의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교육 출판 부문의 하락세 때문이다. 주요 교육도서 출판사(44개사)의 2020년 총 매출액은 약 3조5776억원으로 전년(약 4조227억원)에 비해 11.1% 줄었다. 특히 학습지 출판사(8개사)의 총 매출액이 1조4638억원으로 전년 대비 13.8% 감소한 것이 컸다. 이는 코로나19 확산 방지의 일환으로 이뤄진 학교 폐쇄 등의 여파로 분석된다.

 

유태영·조성민 기자 anarchyn@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