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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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장짜리 보고서가 부른 벼락같은 기회… 주차의 미래를 바꾼다 [모빌리티 열전]

조병욱 기자의 ‘모빌리티 열전’⑨
이정선 마지막삼십분 대표 인터뷰

평범한 회사원의 통장에 ‘50만달러’(약 5억5000만원)가 입금된다면. 이 영화 같은 일이 누군가에게 실제로 일어났다. 처음 계좌 앞에 ‘55’로 시작하는 숫자를 봤을 때만 해도 전날 저녁을 함께 먹은 지인이 더치페이를 위해 5만5000원을 보낸 것이라고 생각했다. “뭘 이체까지 했지”라며 대수롭지 않게 넘기려던 찰나. 그런데 계좌에 찍힌 동그라미 개수가 평소보다 많았다. 정확히 4자리가 더 있었다.

 

◆우연히 보게 된 보고서에서 출발한 창업

 

실시간 주차대행서비스 ‘잇차’의 운영사 마지막삼십분의 이정선(38) 대표의 3년 전 창업 이야기다. 이 대표는 2018년, 스타트업을 운영하던 지인으로부터 미국 벤처캐피탈(VC) 업체의 사업계획서 검토를 부탁받았다. 한·중·일 동북아 주차 시장 진출에 관한 영문 보고서였다. 서울에서 시범 사업을 할 계획도 담겨 있었다.

 

당시 외국계 광고회사에 다니던 이 대표는 마침 국내 주차시장에 관한 리서치를 개인적으로 해둔 게 있어 이를 흔쾌히 건네받았다. 사업계획서를 검토한 결과 국내 시장 사정과는 잘 맞지 않아 보였다. 보고서는 주차 관제 장비를 기반으로 사업을 하겠다고 했으나 이미 국내 시장은 포화 상태였다. 이 대표는 이보다 서비스 기반의 주차 사업이 필요하다는 취지의 12장짜리 보고서를 썼다.

 

그가 쓴 보고서는 미국 실리콘밸리의 1위 자전거공유업체 라임바이크의 창업자들이 만든 신생 VC 아이엠오벤처스로 전해졌다. 이들이 아시아시장에 새로운 사업을 위해 검토하던 중 미국에서 대학을 졸업한 이 대표의 지인을 통해 그의 손까지 사업계획서가 전해졌던 것이다. 알고 보니 이 대표에게 사업계획서를 건넨 지인은 이미 6개월 전부터 이 대표에게 사업을 맡기기 위해 자주 만나며 그의 사업가 자질을 확인해보고 있었다고 했다.

 

이들은 이 대표에게 직접 사업을 맡아달라고 했다. 그 초기자금으로 50만달러를 보낸 것이다. 이 대표는 “처음에는 얼떨떨 했지만 입금을 받은 당일 오후 바로 사표를 낼 결심을 하고 창업 준비를 시작했다”고 말했다. 그는 “당시 세상이 빠르게 변하고 있었는데 유독 주차장은 변화가 더디다는 생각에 의구심을 갖고 있었던 때에 우연히 그 사업계획서를 보게 됐다”고 덧붙였다.

 

이정선 마지막삼십분 대표가 지난 18일 서울 마포구 사무실에서 실시간 주차대행 서비스 ‘잇차’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하상윤 기자

◆외국계 광고회사에서 스타트업 창업자로 변신

 

지난 18일 서울 마포구 본사에서 만난 이 대표는 영화 같은 창업기를 담담하게 말했다. 그는 “처음에는 막막했지만, 10년을 회사 생활을 하다 보니 매너리즘과 번아웃이 동시에 찾아와 대학원 공부를 하거나 마케팅에 대한 다른 일을 생각하고 있었던 터라 창업을 비교적 쉽게 결정했다”고 회상했다.

 

이 대표는 외국계 유명 광고회사에서 기획과 영업 등 다양한 업무를 해왔다. 그의 주 업무는 계획을 만드는 것이었고, 어떤 캠페인을 맡으면 그것이 어떤 목적이며 어떤 형태로 고객들에게 도달할지, 어떤 결과를 낼지 등을 고민하는 것이 그의 일이었다. 이는 사업을 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됐다.

 

마지막삼십분이 서비스하는 ‘잇차’는 강남, 종로, 홍대와 여의도(더현대서울), 김포공항 등 특정 지역에서 주말에 주차를 대신해주는 서비스를 제공한다. 기본 개념은 주차대행(발레파킹)과 비슷한데, 해당 건물이나 호텔 등에서 서비스를 제공하는 게 아니라 예약을 하면 원하는 장소에 링커라고 불리는 주차요원이 15분 전에 도착해 대기했다가 이용자의 차를 인근 주차장에 주차해준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링커, 같은 옷과 향수 쓰는 등 세심한 전략

 

차가 나올 때는 링커가 고객이 있던 곳으로 다시 차를 가져다준다. 특히 이 과정은 실시간으로 촬영돼 차량을 맡긴 고객이 안심하고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그는 링커가 고객과의 유일한 접점이기 때문에 세세한 부분까지 신경 썼다. “링커는 주로 대리운전 풀에 계신 분들 중에서 선발해 같은 향수와 같은 옷으로 신뢰감을 주며 방역 등 서비스 교육에도 신경을 써서 운영하고 있다”며 “현재 인력 풀은 300여명에 이른다”고 말했다. 현재는 시범서비스를 진행하고 있으며 7월부터 본격적인 서비스를 시작할 계획이다.

 

이용 요금은 3시간 기준 9900원이다. “공영 주차장보다 저렴한 가격에 오히려 이렇게 영업을 하는 것에 대한 의구심을 갖는 고객이 있을 정도”라고 말했다. 현재는 시간제 고정요금으로 운영되지만 향후 지역이나 시간에 따른 탄력적 요금으로 변경될 예정이다.

 

합리적인 요금에도 수익을 내는 비결은 공급받는 주차장이 유휴면 이라 저렴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생기는 차액을 서비스로 돌려주는 것으로 사업구조가 설계됐다는 것이 이 대표의 설명이다. 그는 처음 사업을 시작하면서 주차대행 서비스를 직접 체험해보기 위해 강남에서 3개월간 발레파킹 요원으로 일하기도 했다. 그는 “직접 발렛 요원으로 일해보니 조직이 체계적으로 운영되고 시스템도 완결성 있게 이미 구축돼 있었다”며 “다만 현금거래가 많고 근무자 관리가 잘 안 되고 있어 이를 양성화 시키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고 말했다. 

 

이정선 마지막삼십분 대표가 지난 18일 서울 마포구 사무실에서 회사를 알리는 푯말을 들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하상윤 기자

◆직접 발레파킹 요원으로 일하며 시장 분석

 

국내 발레파킹의 시작은 20여년 전 호텔에서 처음 도입된 것이 대형 고급 음식점으로 퍼졌고, 이후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청담동·신사동 등을 중심으로 퍼져나가 용산구 이태원 등 서울 전역으로 정착됐다는 것이 정설이다. 최근에는 이 발레파킹 영업권을 양도하는 등 하나의 시장으로 자리 잡았다.

 

이 대표는 단순히 주차만 대신해주는 서비스를 목표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7월 정식 서비스에는  세차나 전기차 충전 등 다양한 서비스를 담으려고 한다”고 했다. 이어 “우리는 고객만을 위한 서비스가 아니라 주차대행 플랫폼으로서 이곳에서 일하는 링커에게도 다양한 일을 제공하고자 한다. 예를 들어 해당 지역 내에서 주차대행을 하면 얼마를 받고, 킥보드 배터리 교체 시에도 추가 수익을 얻는 식이다. 또한 해당 서비스 지역에서 배달을 의뢰받아 해주는 등 다양한 추가 확장 서비스도 구상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동의 가치는 어떻게 잘 머무르는가에서 온다. 머무름의 가치는 편안함에서 온다. 이것을 만들고자 한다”며 “우리는 주차에서 답을 찾았다. 성장하는 시장에서 선도할 수 있는 것은 서비스 기반의 새로운 시장을 만드는 것”이라고 했다.

 

드라마틱한 시작처럼 이 대표가 탄탄대로만 달려온 것은 아니다. 오히려 어려운 길을 택한 덕분에 사업의 기반도 더 단단해졌다. 지난해 코로나19가 극심할 당시에는 서비스를 일시 중단하기도 했다. 이 대표는 “이동성에서 서비스가 시작되는데 이동 자체가 제한돼 어려움이 많았다”며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이동이 살아나고 이용자가 늘어 올해 가입자는 7000여명, 지난해 서비스는 1000건을 달성했고 올해는 1분기에만 1000건의 서비스가 이뤄졌다”고 말했다.

 

◆쉬운길 대신 어려운 길 택한 창업자

 

현재 주말만 이뤄지는 서비스에도 이유가 있었다. 그는 “처음 서비스를 설계할 때 가장 어려운 것이 주말이었다”며 “불특정 다수가 몰리는 주말을 해결하면 이용 패턴이 정해진 평일은 어렵지 않다고 생각했다”고 자신감을 보였다.

 

그는 “B2B영역이라 할 수 있는 평일은 자신이 있었다. 건물이나 기업 단위로 중심지구에 대한 문제는 해결할 수 있다고 봤다”며 “평일은 건물 단위 월주차나 구독 형태 등 서비스 제공 방법이 상대적으로 간단하다”고 설명했다. 보통 쉬운 길 부터 택해 하나씩 단계를 높여가는 것과 달리 그는 어려운 것부터 도전해 이를 해결했고, 이제는 이를 확산시킬 순탄한 길이 그의 앞에 남은 셈이다.

 

2시간여의 인터뷰 내내 이 대표는 특유의 진지하면서도 솔직한 태도로 일관성 있게 사업 계획을 설명해 나갔다. 아이디어와 보고서만을 보고 적지 않은 투자를 결정한 투자자들은 이 대표의 이러한 점을 높이 평가한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투자자들은 처음 그에게 “사업에 실패해도 좋다. 어차피 우리가 투자한 곳의 9할은 망한다. 대신 그 과정에서 많은 사람을 남겨둬라. 실패에서 배운 것을 그들과 공유해라. 그러면 너에게 다시 투자할 의향이 있다. 꼭 처음에 하려던 사업이 아니어도 괜찮다”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조병욱 기자 brightw@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