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사람을 ‘쓰레기’라고 부를 수 있을까. 있다. 그것도 시정의 막돼먹은 불량배들 사이의 이야기가 아니다. 한 국가의 핵심 부서에 최고위 책임을 맡은 사람 중의 한 분이, 더구나 훌륭한 가계를 자랑하는 집안 출신이 자기 나라에서 살 수 없어 다른 나라로 달아난 사람을 ‘쓰레기 같은 인간’이라고 불렀다. 충격이었다. 그러고 나서 기억을 더듬어 생각해 보니 그런 경우가 이번뿐만이 아니었다. 자기와 생각이 다른 사람을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는 경우는 이전에도 종종 있었다.
오래전에 읽은 소설들이라 정확한 기억은 없지만, 미하일 숄로호프의 ‘조용한 돈강’에 나오는 볼셰비키 혁명가 하나는 이른바 ‘반동분자들’을 처형하기 전에 이들에게 자기들이 묻힐 땅을 파라고 하는데 추운 날씨에 곧 죽을 사람들이 열심히 땅을 파면서 더워하는 것을 보고 일말의 가책을 느낀다. 잠시라도 ‘혁명의 적’이라는 생각에 앞서 이들도 같은 사람이라는 일말의 감정이 스며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을 처형한 후에는 한편 괴로워하면서도 이들의 시신이 자신들이 묻힌 땅을 비옥하게 하리라는 생각으로 자신을 달랜다.
‘25시’로 우리나라에도 잘 알려진 콘스탄틴 게오르규의 ‘제2의 찬스(Second Chance)’에 나오는 혁명가 하나는 사막을 농경지로 만드는 일을 한다. 이 사람은 ‘반동분자’들을 끌고 사막으로 가서 구덩이를 파게 한 후 거기서 사형을 집행한다. 시신을 그 구덩이에 처리한 후 그 위에 나무 한 그루를 심는다. 그렇게 해서 반동분자들을 숙청하면서 점차 사막을 녹지로 만드는 일거양득, 일석이조의 혁명사업을 한다. 이 사람은 앞의 경우와는 달리 이 일에 열중해 있어서 자기가 하는 일에 일말의 후회도 없다. 단지 어떻게 된 일인지 자기 자신이 ‘반혁명분자’로 몰려 체포되어 끌려가고 그가 열정을 기울여 녹토로 만들려고 하던 사막은 쉽게 다시 불모의 땅, 예전의 사막으로 돌아간다. 두 소설에 나오는 두 인물의 또 다른 공통점은 둘 다 결국은 ‘혁명’의 와중에 희생자가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어떻든 간에 이런 경우는 사람이 ‘비료’이니 그래도 ‘쓰레기’보다는 조금 나은 경우인가. ‘쓰레기’란 비료나 퇴비도 되지 못하는 것으로, 처리하는 것도 부담이 되는 지저분하고 귀찮기만 한 대상이라는 뜻일 것이다. 아마도 그런 말씀을 한 분이 이 글을 읽으면 바로 그런 뜻이었다고 좋아할지도 모르겠다. 기회만 주어진다면 이 ‘쓰레기’들을 바로 청소해 버리는 데 주저함이 없을 태세인가?
쓰레기 처리 이야기라면 또 다른 현실의 예가 있다. 독일의 민족사회주의(Nazis)자들은 유대인이나 슬라브인 등을 ‘하등 인간(Untermensch)’이라고 불렀다. 그뿐 아니라 그것이 과학적으로 확실한 근거가 있다는 주장도 강변했다. 나치주의자들의 하등 인간들도 역시 ‘쓰레기’처럼 없애버려도 되는, 아니 없애버려야 하는 존재였을 것이다.
1979년 아직 냉전이 한창이던 시절의 일이다. 남미 니카라과의 소모사(Somoza) 대통령이 본국을 탈출하여 미국으로 망명해서 마이애미에 있는 자신의 저택에 자리를 잡은 일이 있었다. 이때 소련의 국영 타스통신은 미국은 그런 ‘인간쓰레기(human garbage)’나 가서 사는 나라라고 비방하였다. 신문의 해설에 의하면 미국은 소모사 대통령의 망명을 허용하는 것으로, 니카라과 국내에서 많은 혼란과 유혈사태를 피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 나라의 사정이 어떻든 간에 나는 매주 기고하던 칼럼에서 나 자신 그런 독재자에게 일말의 동정도 없지만 사람이 다른 사람을 ‘쓰레기’라고 부르면 안 된다는 지적을 한 일이 있다. 다른 사람들을 ‘쓰레기’라고 부르든, ‘퇴비’나 ‘비료’로 생각하든, ‘하등 민족’이라고 치부하든 간에 자신과 생각이나 이해관계가 다른 사람을 근본적으로 같은 사람으로 생각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공통적인 문제가 있다. 우선은 본인 자신들의 황폐한 인간성이다. 그리고 자신들이 지적하는 비인간화의 결함이란, 실은 이들 대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에게 있다는 점이다. 타스통신에 ‘인간쓰레기’란 표현이 나온 지 10년 남짓 후에 소련은 지도에서 사라졌다.
라종일 가천대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