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입 수시전형에 대한) 신뢰가 형성될 때까지 서울의 주요대학을 중심으로 수시와 정시 비중의 지나친 불균형을 해소하라.”
문재인 대통령이 2019년 10월25일 교육개혁관계장관회의에서 당부한 말이다. 당시 ‘조국 사태’를 계기로 대입 선발 비중이 높은 수시 전형의 불공정성에 대한 비판 목소리가 높아지자 정시전형 확대를 주문한 것이다. 많은 학부모와 학생, 사교육 시장에 영향을 미치는 대학입시를 중심으로 교육의 공정성을 확보하라는 취지가 담겼다. 그만큼 입시를 비롯한 교육제도·정책에 대한 국민 불신은 상당하다. 계층 이동의 주요 사다리로 여겨졌던 교육과 입시가 사다리는커녕 빈부 격차에 따라 대물림된 지 오래이기 때문이다. 가난해도 공부만 잘하면 ‘좋은 대학’을 나와 안정적인 고임금의 일자리를 가질 수 있다는 얘기는 피부에 와닿지 않는 시대다. 고학력에 재산이 많은 부모를 둔 학생일수록 입시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고 좋은 대학에 갈 확률이 매우 높아서다. 이는 다시 삶의 질을 좌우하는 임금 격차로 이어진다.
◆한국 사회의 학벌 프리미엄
1일 한국노동연구원의 ‘대학서열과 생애임금격차’ 보고서에 따르면 좋은 대학으로 불리는 상위권 대학을 졸업한 근로자들은 그러지 못한 졸업자들에 비해 14.0% 많은 임금을 받는 것으로 나타났다.
보고서는 대학서열을 매길 수 있는 4년제 대학을 5~1분위로 나눠 출신학교에 따른 급여차이를 분석했다. 조사결과 최상위권인 5분위 대학을 졸업한 취업자들의 평균 연봉은 3766만원이었고, 최하위권인 1분위 대학 출신은 2912만원을 받았다. 두 그룹의 임금 격차는 시간이 흐를수록 더 벌어져 40~44세일 때 연봉차이는 46.5%나 됐다.
좋은 대학을 나오면 상대적으로 고임금을 받을 수 있는, 즉 학벌 프리미엄이 존재한다는 의미다.
한국개발연구원(KDI)도 ‘고등교육 노동시장 성과와 서열구조 분석’ 보고서에서 “대학 백분위 서열이 1%포인트 상승할 때 시간당 임금은 0.5% 늘어난다”고 밝혔다.
전문가들은 ‘인적자본의 영향이 커서 학벌 프리미엄이 존재한다’고 설명한다. 인적자본은 교육 등으로 그 경제가치나 생산력을 높일 수 있는 배경을 의미한다.
이지영 KDI 전문연구원은 “좋은 학교를 졸업한 이들의 연봉이 높은 이유는 다양하겠지만 그중에서도 대학교육을 통해 더 높은 수준의 인적자본을 획득하거나, 재학 중 동료로부터 좋은 영향을 받아 더 높은 수준의 인적자본을 쌓았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이어 “선배나 동료가 사회적으로 유리한 위치에 있는 모습을 보고 이와 유사한 수준의 일자리를 얻기 위해 노력하면서 결국 양질의 일자리를 확보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학부모들 역시 비슷한 생각을 가진 것으로 조사됐다. 한국교육개발원 조사를 보면 45.6%의 학부모가 개인의 성공 또는 출세 요인으로 ‘학벌’을 꼽았고, 58.8%의 학부모는 ‘학벌에 대한 차별이 심각할 정도로 존재한다’고 응답했다.
◆취지는 좋았으나 교육 불평등 심화 지적받은 수시전형
대입이 학력고사 체제에서 대학수학능력시험 체제로 바뀐 후 수시전형은 1997학년도 입시에서 처음 등장했다. 당시 1.4%에 그쳤던 수시 선발 비율은 2002학년도 입시 때부터 급증했다. 김대중정부 시절 이해찬 교육부 장관이 ‘한 가지 특기만 있어도 대학에 갈 수 있다’며 수시 선발 비중을 30% 가까이 확대한 것이다. 학생들이 입시 부담을 벗고 다양한 개성을 발휘하면서 대학에 쉽게 갈 수 있도록 하겠다는 취지였다. 취지는 살리지 못했지만 수시 비중은 계속 증가했고, 2007학년도에서는 처음으로 수시와 정시 비중이 역전됐다. 수시 전형의 모습도 변신에 변신을 거듭해 엄청 복잡해져 사교육 시장 의존도를 키웠다. 2008학년도에 도입된 입학사정관제도 학교생활기록부와 교내외 활동까지 모두 반영해 외부 스펙 경쟁을 유발한다는 지적을 받았다. 2013학년도에는 수시 학생부종합전형(학종)이 도입돼 학생부와 자기소개서 등 교내 활동 자료를 중심으로 신입생을 선발했고, 학종은 곧 수시 비중의 절반 이상을 차지했다. 특기자 전형도 신설됐다. 내신은 우수하지 않아도 어학이나 과학 등 특정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낸 학생들은 특기자 전형으로 대학에 진학했다.
◆부모의 능력 경쟁된 수시
결과보다 과정을 중시한 수시전형의 도입 취지는 좋았지만 시행 과정에서 부작용이 상당했다. 대학은 학생들의 평소 학교생활을 평가하기 위해 스펙을 참조했고, 부모의 지원 사격을 충분히 받을 수 있는 학생들은 좋은 대학 입시에 유리한 고등학교를 들어간 뒤 논문 작성이나 인턴 경험 등 화려한 스펙을 뽐내며 수시 관문을 수월하게 통과했다. 학생 본인의 역량이나 노력 외에 부모 능력과 고교 유형 등 외부 환경이 입시 당락에 큰 영향을 주고 그 기준마저 명확하지 않아 ‘금수저 전형’이라는 비판까지 제기됐다. 특기자 전형만 해도 과학고와 외국어고, 국제고 등 사실상 특수목적고 학생들을 위한 제도라는 평가가 나오면서 고교서열화 논란으로 이어졌다.
특히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자녀의 입시 부정 의혹 사태가 수시전형 불신을 더욱 부채질했다.
문 대통령의 주문 이후 유은혜 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은 “불신받는 학종의 비율이 높은 대학은 불가피하게 정시와 학종의 비율을 적정하게 균형을 맞춰야 한다”고 말했다.
교육부는 뒤늦게 정시 확대방안을 내놨지만 그런다고 교육의 공정성과 사다리 역할이 회복될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홍세화 전 학벌없는사회 대표가 “이젠 부모의 배경 없이는 학벌을 갖기도 어렵고, 가지더라도 당대의 노력으로 부모의 격차를 메울 수 없는 정도가 됐다”고 지적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정시’ 확대로 돌아섰지만… ‘사다리 재건’ 역할엔 의문
정부가 수시전형 비중을 축소하고 정시전형 비중을 늘리기로 한 것은 교육 기회의 공정성 확보를 위해서다. 취지와 다르게 교육이 계층 이동 사다리가 아니라 계층 대물림을 가속화한다는 비판 여론을 감안한 조치다. 하지만 임기응변식의 잦은 정책 변경에 따라 일선 교육 현장의 혼란이 가중된다는 우려와 함께 교육 문제의 근본적인 해법과 거리가 멀다는 목소리가 적지 않다.
1일 교육계에 따르면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는 정시확대에 대해 “정치권에 떠밀려 정책을 급조했다”고 비판했다. 조성철 한국교총 대변인은 “교육정책에 대해 찬반이 엇갈릴 수 있지만 현장에서는 교육정책이 너무 자주 바뀐다고 우려한다”며 “잦은 정책 수정이 이뤄질 경우 정보에 가까운 쪽이 유리해질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정부가 바뀔 때마다 교육정책은 수정됐다. 이번 정부에서도 마찬가지다. 2017년 8월 공개된 대학수학능력시험 개편안은 여론의 반발에 1년간 유예됐다. 유치원 방과 후 수업에서 영어교육을 금지하는 방안도 추진됐지만 역풍을 맞아 중단되기도 했다.
정시확대가 교육의 공정성을 담보할 수 있느냐를 두고도 의견은 갈린다. 정소영 전국교직원노동조합 대변인은 “대학 서열화가 공고한 상황에서 정시확대는 이를 옹호하는 정책이 될 수밖에 없다”며 “교육 계층 사다리를 복원하겠다는 취지에 어긋난다”고 꼬집었다.
수능에 서술형을 도입하거나 논술형으로 개선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이범 교육평론가는 한 토론회에서 “사고능력과 논증능력은 오지선다 시험인 수능으로 알아볼 수 없다”며 “선진국에서 입시를 논술형으로 치르는 것도 이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캐나다와 노르웨이를 제외한 모든 국가는 표준화된 대입 시험이 있고, 영국과 프랑스, 독일, 호주, 이탈리아, 덴마크 등에서는 대입 시험을 논술형으로 치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경회 성신여대 교육학과 “교수는 주입식 교육으로 회귀한다는 비판을 피하기 위해 서술형 문항 도입을 검토하는 것이 맞다”며 “논술이 도입됐을 때 채점 등 관리를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논의도 따라야 한다”고 조언했다.
임성호 종로학원하늘교육 대표는 “고교학점제 등 변화하는 제도에 맞춰 수능제도에 맞춰 논술형을 도입하는 방안을 논의할 수 있다”면서도 “문이과 통합수능이 치러지지도 않은 상황에서 수능제도에 변화를 주겠다고 하면 교육 소비자들은 불안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교육부는 2025학년도부터 전국 고등학교에 학점제가 도입되는 만큼 새로운 대입 평가방식 도입을 검토하고 있다. 2028학년도 수능부터 논술이나 서술형 시험을 도입하는 방안도 논의할 계획이다.
정필재 기자 rush@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