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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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재우의미·중관계사] 우빙젠에게 신세 진 미국

오늘날의 자유무역체제는 19세기 미국과 중국 교역에서 그 제도적 기초가 수립됐다. 미국은 중국 행상의 도움으로 중국무역에서 개인어음으로 대금을 지불하는 제도를 소개했다. 이른바 개인 신용 거래의 물꼬를 튼 것이다. 이는 영국의 아시아 무역 독점 체제의 토대를 붕괴시켰다. 이때까지만 해도 외국의 중국무역은 영국의 은행만을 통한 환어음제에 기반했다.

미국은 중국무역의 후발주자였기에 몇 가지 진입장벽이 있었다. 가장 큰 장벽은 무역대금의 지불 능력이었다. 긴 여정을 요하는 중국무역 자체가 막대한 투자를 요했다. 그런데 미국의 저가 수출제품(인삼, 모피 등)을 팔아서 중국의 고가품(차, 본차이나, 비단) 지불이 어려웠다. 현금거래만 가능했던 당시(1804∼28년)에 미국은 물건을 다 팔아도 차값의 35%, 미국 수입품의 22%밖에 벌지 못했다. 은화를 다 긁어모아도 충당하기 어려웠다.

우빙젠과 미국 상인. 출처:위키피디아

이런 상황에서 미국은 개인어음을 1820년부터 중국에 가져왔다. 이것의 통용 가능성을 미국 상인들은 청나라의 대외무역독점체계에서 봤다. 이를 운영한 13개의 행상(하우쿼, 浩官) 중 미국의 신용거래 제안을 받아들인 이가 당시 세계 최대 갑부였던 우빙젠(伍秉鑑, 1769∼1843)이었다. 그의 재산은 1834년 기준 2600억 미 달러로, 오늘날 중국의 빌 게이츠였다. 그의 진솔한 인품은 미국 상인들과 잘 통해서 서로를 신뢰하는 데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그는 1825년 대미 관세 인하를 당국에 건의했고 1842년에 행상제도를 중단시켰다. 그의 재력으로 미국인들의 부채를 탕감시키는 데도 앞장섰다. 한번에 200만∼300만달러를 동원할 수 있는 재력 때문이었다. 그는 그의 수혜자들과 함께 미국의 건설 사업에도 종잣돈을 지원했다. 존 케리 전 국무장관의 종증조부 존 포브스는 우빙젠의 미국 자산을 운영했고, 매년 6만달러의 수익금을 그의 후손에게 상당기간(1858∼1879) 송금했다. 우빙젠의 초상화는 포브스 별장에도 걸려 있다. 오늘날 미·중 무역 분쟁을 보면서 우빙젠과 같이 진솔하고 신뢰성 강한 인물의 필요성을 절감할 수 있다.

주재우 경희대 교수·국제정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