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자안내도가 있으면 뭐합니까. 내용은 엉망진창인데… 그냥 없다고 생각하고 삽니다.”
지팡이에 의지해 다니는 시각장애인 박모(54)씨에게 ‘처음 가는 곳’은 늘 ‘긴장되는 곳’이다. 예상치 못한 곳에서 계단을 만나 발을 헛디디거나 낮은 조형물 등에 부딪히는 일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가끔 찾는 구청 등 관공서 역시 불안하긴 마찬가지다. 건물 입구에 시각장애인을 위한 점자안내도(건물 내부 공간을 돌출된 선과 면, 점자 등으로 표시해 시각장애인이 건물 정보를 파악할 수 있도록 돕는 시설)가 설치돼 있지만, 정작 박씨는 점자안내도를 그냥 지나친다. 박씨는 “구색만 갖춰놨을 뿐 실제로 만져보면 엉뚱한 정보가 있는 경우가 많다”며 “비장애인이 보는 안내판은 틀린 정보가 있으면 바로 수정하지만 점자안내도는 수정해달라 해도 신경도 안 쓴다. 관공서가 이러니 민간시설은 어떻겠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구청과 경찰서 등 관공서는 건물 앞에 점자안내도를 의무 설치하게 돼 있지만, 서울 시내 구청·경찰서의 점자안내도 관리 실태는 엉망인 것으로 확인됐다. 아예 점자안내도가 없거나 설치하더라도 실제 구조와 다른 정보를 제공하는 곳이 많았다. 관공서에서조차 시각장애인 이동권 문제에 소홀한 것이다.
6일 세계일보 취재 결과 서울 시내 경찰서 31곳 중 점자안내도를 제대로 설치한 곳은 10곳(32.3%)에 그쳤다. 구청 역시 25곳 중 10곳(40%)에 불과했다. 서울 경찰서와 구청 중 3분의 2가량이 불량 점자안내도를 설치했거나 아예 설치하지 않은 것이다.
경찰서의 경우 수서서를 제외한 30곳에 점자안내도가 설치돼 있어 설치율은 높았지만, 점자안내도 대부분(20곳)이 실제 건물 구조를 반영하지 못하고 있었다. 마포서의 점자안내도는 1층 로비 옆에 상담실과 청문감사실, 마약반이 있다고 표시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카페가 있는 등 모두 제 위치와 달랐다. 혜화서는 오래전 별관으로 옮긴 교통과가 여전히 본관에 있는 것으로 표기하고 있었고, 중부서는 별관이 3층 건물이지만 2층 건물로 표시돼 있어 3층 정보는 아예 없었다.
구청은 25곳 중 15곳에만 점자안내도가 있어 설치율도 60%에 그쳤다. 은평구청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때문에 점자안내도를 치웠다’고 설명했다. 코로나19로 청사 출입구가 일원화되면서 통행이 ‘불편해져’ 점자안내도를 치워버렸다는 것이다. 장애인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점자안내도를 설치한 15곳 중 5곳 역시 엉터리 정보를 담고 있었다.
점자안내도의 정확성이 떨어지는 것은 구청·경찰서가 증축, 리모델링 등으로 건물 구조를 바꿔도 점자안내도는 수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시각장애인 박씨는 “시각장애인이 올 거라는 생각 자체를 안 한다. 어차피 아무도 안 쓰니 대충 만들어도 된다는 식”이라며 “그냥 우리는 없는 존재로 생각하는 것 같다”고 토로했다.
관리도 소홀했다. 중구청의 점자안내도는 입구 옆 구석의 대형 파라솔 뒤에 ‘숨겨져’ 있어 시각장애인이 점자안내도를 찾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해 보였다. 성북서의 점자안내도도 코로나19 홍보물에 가려져 있었다. 도봉서와 강동구청은 촉각으로 정보를 알기 힘들 정도로 점자와 글씨가 마모돼 있었다. 이밖에 점자블록과 떨어져 있어 시각장애인이 찾기 어렵거나 한번도 닦지 않은 것처럼 갈색 먼지가 가득 쌓인 점자안내도도 많았다. 한국시각장애인연합회 이연주 정책팀장은 “모범이 돼야 할 관공서에서조차 시각장애인 이동권을 고려하지 않는 모습”이라며 “설치는 물론 사후관리도 중요한 만큼 관공서마다 장애인 시설 관리 책임자를 지정하고 체계적으로 관리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장애인 편의시설 관리 주체인 보건복지부 관계자는 “부정확한 점자안내도를 방치한 경우가 있는지 현황을 확인하고 필요하면 시정하도록 조치하겠다”고 밝혔다.
김병관·박지원 기자 gwan2@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