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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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현의 일상 속 문화사] “인류사회는 사물에 가치 부여하는 일에 익숙”

(21) 예술작품의 가치 무엇으로 결정되나

사람들 대체불가능한 자산에 열광
존재하지도 않는 조각상에 거액 투자

1950년대 뉴욕서 큰 돈 번 신흥부자들
자신들만의 새로운 지위상징 필요로
팝아트작품 대거 사들이며 가치 높여

작품의 금전적 가치, 결국 사람이 결정
살바토레 가라우가 지난달에 전시한 작품 ‘사색하는 부처’. 광장의 한가운데 작품의 위치만 표시해놓았을 뿐 작품은 보이지 않는다. 작가에 따르면 이 작품은 보는 사람의 상상력 속에 ‘존재’한다.

지난 글에서는 대체 불가능 토큰(NFT)이 그동안 소유권 지정이 사실상 불가능했던 디지털 작품에 블록체인 기술을 사용해 투자가치를 만들어냈다는 이야기를 했다. 하나의 픽셀도 차이가 없는 완벽한 복제품을 얼마든지 만들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블록체인으로 지정한 소유권이 가치가 있다고 여겨지기 위해서는 사회적 약속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 글에서도 이야기했듯, 인류사회는 종이화폐처럼 현물로서는 아무런 쓸모가 없는 사물에 가치를 부여하는 일에 익숙하다. NFT는 그런 작동방식이 디지털 세상에 적용된 최신 버전일 뿐이다.

지난주에 이탈리아에서 똑같은 일이 일어났다. 살바토레 가라우라는 60대의 아티스트가 ‘로 소노(Lo Sono)’라는 조각상을 경매를 통해 우리 돈으로 약 2000만원에 팔았다. 여기까지는 별다를 게 없는 일인데 화제가 된 것은 이 작품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티스트는 이 작품은 “공기와 정신(spirit)으로 만들어져 있기 때문에 눈에 보이지 않지만 존재한다”면서 “이 작품은 당신이 상상력을 발휘하게 만든다”고 주장했다.

사람의 상상력 속에서만 존재한다는 이 작품을 구매한 사람은 뭘 산 것일까. 엄밀하게 말하면 아티스트가 서명한 진품 증명서를 산 셈이다. 증명서를 위조할 수는 있지만 경매장에 판매 기록이 남아있고, 이 사실이 큰 뉴스가 되어 세계에 퍼졌으니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이 작품이 그 사람의 것임을 부정할 사람은 없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이렇게 안전한 소유권도 없다. 실체가 있는 작품이라면 손상과 도난을 우려해 많은 안전장치를 유지해야 하지만,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작품이니 훔쳐갈 수도 없다. 만약 진품 증명서를 훔치거나 위조한다고 해도 경매장에 남아있는 기록과 전 세계에 퍼진 판매 뉴스가 남아있으니 “내가 로 소노의 소유자”라고 해도 아무도 믿지 않는다. 살바토레 가라우는 블록체인 기술을 사용하지 않았지만, 그 소유권의 작동방식은 다르지 않다. 블록체인에 기록된 소유권을 바꾸는 것은 세상에 퍼진 모든 뉴스 기사를 전부 바꾸는 것만큼이나, 혹은 그 이상으로 어려운,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이런 의문이 생긴다. 그렇다면 볼 수도 없는 그 예술작품은 정말로 그만한 가치가 있을까. 로 소노는 2000만원이었지만 사람들은 NFT를 통해 디지털 작품에 수십억 원의 돈도 마다치 않고 지불하는데, 그런 작품들이 정말 비슷한 가격의 유명 미술관에 걸린 고전 명화들만큼의 가치가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예술작품의 가치는 누가, 어떻게 결정할까.

예술작품의 진정한 가치를 측정하는 것은 철학적 문제이기 때문에 답하기 힘들지만, ‘금전적’ 가치를 이야기한다면 쉽게 답할 수 있다. 예술작품의 금전적 가치는 사는 사람이 결정한다. 많은 예술작품이 경매를 통해 팔리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물론 화랑에 가면 작가가 요구하는 가격이 붙어있지만 그건 그 작가가 원하는 가격일 뿐이다. 아무도 사지 않으면 그 작품은 아무런 금전적 가치가 없다.

여기에서 비플(Beeple)을 비롯해 NFT로 큰 부자가 된 아티스트들의 작품을 누가 구매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누가 도대체 수십 수백억 원의 돈을 실제 작품이 아닌 소유 증명에 불과한 NFT를 구매하는 데 썼을까. 구매자들은 전통적인 미술 애호가, 수집가들이 아니라 비트코인 등으로 큰 돈을 번 사람들이었다. 그중에는 뒤늦게 암호화폐에 투자한 사람들도 있겠지만, 비트코인 갑부들은 대개 암호화폐의 가치가 아주 낮았던 시절에 사서 가지고 있다가 느닷없이 부자가 된 사람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NFT처럼 위험한 투자에 돈을 쉽게, 함부로 쓸 수 있다는 얘기가 아니다. ‘비트코인 맥시멀리스트(maximalist)’라고 불리는 이들은 비트코인과 블록체인이 세상을 바꿀 기술이라는 강한 확신을 그 누구보다도 일찍부터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자신이 갑부가 된 것은 그러한 믿음이 증명된 것이고, 이는 앞으로도 계속 증명될 것으로 생각한다. 따라서 그들이 블록체인 기술을 사용한 NFT가 붙은 디지털 예술작품을 구매한 것은 블록체인 기술의 가치와 가능성을 널리 알리는 중요한 홍보일 뿐 아니라, 앞으로 그렇게 미래가 밝다면 제일 먼저 그 시장에 들어가서 선점을 하는 게 당연한 투자행위다.

물론 그렇다고 NFT를 통해 판매된 디지털 작품들이 예술적 가치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이번에 큰 인기를 끌었던 작품들은 이미 온라인에서 상당히 알려진 작가들의 인기 작품들이다. 다만, 그렇다 해도 그 작품들이 18, 19세기 미술사의 거장들의 작품과 같은 금전적인 가치가 있느냐를 묻는다면 “비트코인으로 돈을 번 젊은 갑부들 외의 수집가들도 그 작품을 구매할 것인가”를 물어야 한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아직 확답할 수 없다.

앤디 워홀의 1963년 작품 ‘36번의 에셀 스컬’. 에셀과 그의 남편 로버트 스컬은 당시 택시사업으로 큰돈을 번 신흥부자였고, 워홀 같은 젊은 작가들의 작품을 집중적으로 구입하면서 팝아트가 성장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하지만 이런 일이 처음 있는 것도 아니다. 미술사에서 유명한 예가 미국 현대 미술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팝아트(Pop art)다. 1950년대에 흐름이 본격화되면서 1960년대에 이르면 앤디 워홀, 로이 리히텐슈타인, 클래스 올덴버그 등의 작가들이 1940년대 미국 미술계를 휩쓸었던 잭슨 폴록이나 윌럼 데 쿠닝 같은 추상표현주의(Abstract expressionism) 작가들을 제치고 대중의 시선을 붙잡았다. 팝아트가 워낙 유명한 대중적 이미지를 즐겨 사용한 탓에 이해하기 어려워서 엘리트주의라는 낙인이 붙었던 추상표현주의에 비해 많은 팬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사람들이 쉽게 좋아하는 디지털 아티스트 비플과 마찬가지로 팝아트 역시 쉽고 이해하기 좋다고 해서 금전적인 가치가 보장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 작품들을 큰돈을 주고 사는 수집가가 있어야 한다. 추상표현주의를 비롯해 미국 미술을 흥행시킨 전설적인 화상(?商) 레오 카스텔리는 팝아티스트들의 가능성을 보고 적극적으로 홍보했고, 무엇보다 1950년대 뉴욕에서 택시사업으로 큰돈을 번 로버트와 에셀 스컬 부부 같은 신흥부자들이 이들의 작품을 대거 사들이면서 팝아트의 금전적 가치를 올려놓았다.

당시 신흥부자들에게는 자신들만의 새로운 지위상징이 필요했다. 새로운 세대는 새로운 문화로 차별화를 해야 한다. 20세기 초에 돈을 번 전통적인 갑부들(old money)이 추상표현주의 작품을 수집하는데 그들을 따라 하는 건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옛날 갑부들이 간과하는 새로운 아티스트들을 찾으려 했고, 카스텔리 같은 갤러리들이 그들에게 딱 맞는 신진 작가들을 소개하면서 팝아트는 대중적 인기와 금전적 가치를 단번에 획득할 수 있었던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