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나라 함풍제의 반서구 정책(1850∼61)이 공친왕 시기(1860∼84)로 오면서 전환됐다. 서구와의 화합과 협력 필요성을 인지한 그는 미국과의 협력을 우선시했다. 1862년에 부임해 1867년 임기를 마치고 귀국하던 주중 미국 공사 앤슨 벌링게임(Anson Burlingame)을 위해 베푼 연회 자리에서 공친왕은 그에게 청의 외교교섭을 담당하던 부처 ‘총리아문’의 외교대신 임명을 제안했다. 곧 있을 미국과 서구 순방에서 중국사절단의 단장 자리였다. 벌링게임은 전권대신 수락의사를 11월 21일에 윌리엄 수어드 국무장관에게 전했다.
청 조정이 벌링게임에 대한 신뢰가 강했던 가장 큰 이유는 미국의 당시 중국정책을 진솔하게 잘 수행했기 때문이다. 미국은 ‘협력정책’을 기조로 삼았다. 이의 핵심은 서구 열강과의 협력뿐만 아니라 청 조정과의 협력을 강조한 데 있었다. 당시 링컨 대통령과 수어드 국무장관도 그에게 이를 훈령으로 내릴 정도였다.
그는 재임 동안 몇 가지 사건을 협력 정책 기조에 따라 처리한 것이 청의 높은 신뢰를 샀다. 특히 ‘제너럴셔먼호(號) 사건(1866)’은 당시 조선인들이 이 배의 선원을 살해한 사건이었다. 중국이 조선에 대한 복속권을 가졌음에도 중국의 책임을 부정하자 그는 당시 아시아함대사령관이 워싱턴과 이의 처리를 상의할 것을 건의했다.
사령관의 경솔한 보복행동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또한 이를 계기로 프랑스가 조선을 위협할 가능성을 우려했다. 링컨 대통령의 암살(1865)과 승계자 앤드루 잭슨의 탄핵(1866) 등으로 완전한 해결을 보지 못했지만 그의 해결방식은 당시 미국 협력정책의 정신을 잘 보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중국의 미국에 대한 신뢰는 외교인재를 배양하기 위해 설립된 동문관에서도 나타났다. 청 조정은 미 공사의 통역이자 선교사였던 윌리엄 마틴(W.A.P. Martin)을 1869년에 국제법 교수와 관장에 임명했고, 그는 1895년까지 26년 동안 재임했다. 은퇴 후 광서제는 그를 베이징대학의 첫 총장으로 임명했다. 미·중 밀월관계의 시작을 알리는 징표들이었다.
주재우 경희대 교수·국제정치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