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월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승소한 뒤 낸 재산명시 신청을 법원이 받아들였다. 재판부는 1965년 한일청구권 협정으로 할머니들의 손해배상 청구권이 소멸되지 않았다고 판단했다. 국가면제 원칙도 적용하지 않았다.
15일 법조계에 따르면 서울중앙지법 민사51단독 남성우 판사는 지난 9일 고(故) 배춘희 할머니 등 위안부 피해 할머니 12명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낸 재산명시 신청을 인용했다.
남 판사는 재산명시 신청을 인용하며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이 일본 정부에 대한 손해배상청구권을 갖고 있는지, 위안부 문제에 국가면제 원칙이 적용될 수 있는지도 함께 판단했다.
남 판사는 일제 징용 피해자들이 일본 기업에 손해배상청구권을 갖는다는 2018년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을 들며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에게도 일본 정부에 대한 손해배상청구권이 존재한다고 판시했다. 남 판사는 “강제동원 노동자들의 일본 기업에 대한 위자료 청구권은 한일청구권 협정의 적용 대상에 포함되지 않아 소구할 수 있다고 판단한 대법원 판결이 있었다”며 “채권자(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손해배상청구권 성격을 강제동원 노동자들의 손해배상청구권과 달리 볼 수 없으므로 채권자들의 손해배상청구권은 소구할 수 없거나 강제집행을 신청할 수 없는 권리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남 판사는 2015년 한·일 양국의 위안부 합의에 대해서도 “국회의 동의를 거치지 않은 정부 간 합의에 불과해 조약에 해당한다고 볼 수 없으므로 비엔나협약의 위반 여부와는 더욱 관계가 없다”고 했다.
남 판사는 주권 국가가 다른 나라 법정에 서지 않는다는 국가면제 원칙도 위안부 문제에서는 허용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남 판사는 “인권에 대한 중대한 침해행위에 대해 국가면제를 인정하게 되면 국제사회의 공동의 이익이 위협받게 되고 오히려 국가 간 우호관계를 해하는 결과를 야기할 수 있다”고 밝혔다.
이날 법원이 한국 내 일본 정부 재산을 찾을 수 있도록 허용하면서 한·일 관계가 악화할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남 판사는 결정문에서 “강제집행의 실시 이후 발생할 수 있는 대일관계의 악화, 경제보복 등의 국가 간 긴장 발생 문제는 외교권을 관할하는 행정부의 고유 영역”이라고 선을 그었다.
이희진 기자 heejin@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