갸름한 얼굴과 가늘고 긴 곡선의 신체, 반짝반짝 빛나는 듯하면서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아낼 것 같은 큰 눈….
대중매체를 통해 반복적으로 재현되는 여성의 이런 모습은 흔히 ‘순정만화의 주인공 같다’는 표현으로 종종 미화된다. 대체로 이런 식의 표현은 수동적이며, 남성과의 관계를 통해 규정되는 여성상을 내포한다. 여성에 대한 뿌리깊은 편견을 시각화한 순정만화 속 여성상은 당대 사회상의 반영이기도 하다. 근간 ‘시대가 그려낸 소녀’는 순정만화가 등장하면서 만들어진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여성상과 그런 이미지가 시대에 따라 바뀌어 온 흐름을 소개한다.
1957년 단행본으로 나온 한성학의 ‘영원한 종’은 초창기 순정만화에 빈번하게 등장하는 전형적인 특징을 보여준다. 한국 최초의 순정만화로 꼽히는 이 작품은 6·25전쟁이 끝나고 얼마 되지 않은 시점에 나온 것이라 전쟁, 혈육의 부재, 가난, 착한 소녀의 행복한 결말을 특징으로 한다. 주요 인물인 소녀들은 모두 긴 속눈썹과 큰 눈을 갖고 있고, 꽃그림으로 칸을 장식한다는 점 등이 형식적으로 두드러진다. 이런 특징은 순정만화가 시장에 정착하는 1960년대보다 세련된 그림체로 발전한다. 이것이 ‘여자들이 보는 뻔한 사랑 이야기’ 혹은 ‘신데렐라 콤플렉스를 자극하는 로맨스’라는 꼬리표를 순정만화에 달게 되는 단초였고, 장르 자체에 대한 차별적 시선, 편견까지 낳는 시작이었다.
하지만 1980년대 이후에는 ‘순정’이라는 단어로 정체성을 표현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은 작품들이 다수 등장한다. 1986년 작 ‘아르미안의 네 딸들’, 1989년 작 ‘불의 검’ 등에는 이전 순정만화에서는 보기 힘든 ‘혁명적인 여성 캐릭터’가 등장한다. 책은 ‘불의 검’의 주인공 ‘아라’를 “철기시대를 여는 제철 기술자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이때까지의 어떤 순정만화에서도 볼 수 없던 설정”이라고 평가했다. 저자인 만화연구가 김소원씨는 “1980년대 초에서 1990년대 말까지 한국만화의 역사에서 순정만화라고 불린 작품의 상당수는 단순히 순정만화라는 카테고리만으로 묶을 수 없다”며 “역사, SF, 무협, 코미디 등 폭넓은 서사가 존재했고, 특유의 표현미학이 완성되었으며 시대에 대한 깊은 고민과 성찰이 담겼다”고 밝혔다.
일본 순정만화의 역사에서는 ‘총후소녀’(銃後少女)라는 말로 대표되는 여성상이 흥미를 끈다. 일제가 전쟁에 골몰하던 1930년대 말 이후 등장한 개념으로, 당시 성인 여성을 대상으로 한 ‘총후부인’과 같은 맥락에 있다. 총후부인은 “군국주의 일본의 여성상을 정의하는 키워드의 하나”로 “전쟁에 끌려간 남편을 대신해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강인함과 남편 혹은 아들의 전사 소식도 영광으로 받아들이는 의연함”을 보인다. 총후소녀 역시 “후방에서 아버지, 오빠의 빈자리를 메꾸고 전쟁을 응원하며 어머니를 돕는 역할”로 그려졌다. 이런 캐릭터들은 군복, 비행기 등과 같이 전쟁을 상징하는 의상과 배경, 소품 등으로 꾸며졌다. 책은 예비 현모양처 정도로만 기대를 받았던 소녀들이 전쟁기가 되어서야 “비로소 국민으로 인정받게 되었다는 해석은 매우 흥미롭다”며 “소녀들이 비로소 결혼과 출산을 유예받은 잉여적 존재가 아니라 국가를 위해 생산적인 활동을 하는 국민으로 인정받은 것”이라라고 소개했다.
강구열 기자 river910@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