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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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종일칼럼] 정치인과 책임 윤리

6·25 71돌… 긴장 여전한 한반도
당시 지도자 책임 청산 없기 때문
최근 과오 정치인들 행태 아쉬워
잘못 인정·책임지는 모습 보여야

다른 직업에서도 마찬가지이겠지만 정치인, 특히 지도자급의 정치인이 똑바로 유념해야 하는 문제가 있다. 다름 아닌 책임윤리이다. 아무리 좋은 뜻이나 올바른 목적을 갖고 어떤 일을 수행했다 할지라도 결과가 좋지 못하면 변명의 여지 없이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다. 막스 베버는 이 점을 강조하면서 이를 ‘의미의 윤리’와 ‘책임의 윤리’로 구별했다. 어떤 분의 말씀대로 침략을 받아 국토가 유린돼 민생은 도탄에 빠졌는데 지도자가 폐허 위에 서서, 나는 평화를 추구했다는 식의 말만 하고 있으면 되는 일이 아니다. 한국에만 국한되는 현상은 아니지만 어째서 우리 정치인 중에서는 이런 정치의 기본에 충실하지 못하는 경우가 눈에 띄는지, 역시 가까운 분들의 잘못에는 더 민감한 것인가.

6·25전쟁 71주년을 맞았다. 한반도에서 3년에 걸친 전쟁이 끝나고 휴전 협정이 이루어진 60주년이 되는 해 중국의 한 신문에서 원고 청탁이 왔다. 정전이 된 후 두 세대가 지났는데도 어째서 한반도에는 아직도 긴장이 감돌 뿐 아니라 이것이 때때로 군사적 충돌로 이어지기까지 하는가? 외부인이 당연히 제기할 만한 문제였다. 나는 별 주저 없이 바로 원고를 보내주었다.

라종일 가천대 석좌교수

요지는 의미 없는 어리석은 전쟁에 책임이 있는 지도자들이 자신의 잘못에 책임을 지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스스로를 위대한 일을 한 영웅으로 자리매김하기까지 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김일성이 전쟁을 시작한 목적은 한반도를 통일하고, 그 위에 사회주의를 실현하려는 것이었다. 이 목적을 위해 외국에 간청하여 허락을 얻고, 압도적인 지원으로 전쟁을 한 것은 그냥 지나치기로 하자. 그런데 전쟁이 끝났을 때 이런 목표와 달리 국토 분단은 더욱 공고하게 됐다. 이것은 단순히 38선을 대신한 비무장지대의 문제만이 아니었다. 남북한 모두 한국인의 마음속에 자리 잡은 상대방에 대한 원한과 증오가 더 큰 분단이었다.

그 외에도 아직 편지 하나 제대로 주고받지 못하고 떨어져 있는 이산가족의 문제도 그대로 남아 있다. 파멸적인 파괴와 살상을 치르고 통일이나 사회주의 실현은커녕 분단의 고착에 반공주의만 키운 전쟁에 대해 김일성은 어떤 책임을 졌는가. 최소한도로 사죄를 하고 자리에서 물러나기보다는 오히려 자신을 미국의 침략을 저지한 위대한 지도자로 자처하고 권력에 도전할 만한 경쟁자를 숙청해 자리를 보전하는 데 나섰다.

이승만도 크게 다르지 않은 경우다. 남북한의 군비 불균형이 심각한데 이에 대한 방비도 부실한 상황에서, 오히려 ‘북진 통일’ 같은 비현실적인 구호로 국민을 오도했다. 실상 전쟁이 일어났을 때 이를 미리 탐지하고 대비하기보다는 기습을 당해 패퇴를 거듭하는 상황에서도 거짓 정보로 국민을 방심하게 하고 혼자 수도를 버리고 달아났다. 국난에 처해 나라를 지킨 공이 있었다고 할지라도 전쟁이 끝났을 때 혹은 늦어도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체결됐을 때 전쟁에 대한 책임을 지는 말과 함께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났어야 했다. 그러나 그 또한 책임을 말하기보다 스스로를 ‘국부’라고 칭하게 하기까지 하면서 자리를 지켰다. 지도자들이 이러하니 국민도 어리석은 전쟁에 대해 반성을 하지 못했다.

중국 신문에서는 처음 이 원고를 게재할 수 없겠다는 의사를 전해 왔다. 내가, 사정이 그렇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다른 매체에 기고를 하고 이런 사정까지 밝히겠다고 했더니 조금만 기다려 달라는 부탁이 왔다. 그 사이 내부 조율이 있었는지 며칠 후 원문 그대로 싣겠다는 답이 왔고, 그 글이 게재된 신문을 받았다.

근래 지도자급 정치인 중에 잘못이 있는 경우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도 마음을 괴롭힌다. 훌륭한 분들이 자신의 사회적인 명성과 현실 사이에서 고민한 것을 폄하할 생각은 없다. 단지 잘못을 저질렀다면 평소에 누렸던 명성이나 일반인의 시선 속에 있는 이미지와 크게 다른 자신의 실상을 직면해야 하지 않겠는가. 솔직한 잘못의 인정과 함께 사과를 하고 응분의 책임을 지는 것이 지도자로서 옳은 일이 아닌가. 자살을 하는 것으로 온갖 책임에서 벗어난다고 생각하는 것이 우리 정치인의 새로운 풍조가 되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라종일 가천대 석좌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