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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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끔찍한 비극을 막아야 한다!… 재앙 속으로 몸을 던진 영웅들

영화 ‘체르노빌 1986’

35년 전 원전폭발로 3500명 목숨 잃고
40만여명이 암·기형 등 고통 받은 사고
당시 방사능 오염수에 뛰어든 세 남자
2차 폭발 막아 소련과 전 세계를 구해
각국서 이슈인 원전 사고 위험성 강조
영화 ‘체르노빌 1986’에서 원자력발전소가 폭발한 현장에 한발 늦게 도착한 소방관 알렉세이(오른쪽)가 방사선 노출로 쓰러진 동료 소방관을 부축하고 있다. 목요일 아침 제공

1986년 4월26일 오전 1시24분. 소련이 자랑하던 ‘인간이 만든 태양’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 제4호기 원자로가 폭발했다. 당시 원전이 위치한 도시 프리피야트에는 발전소 직원과 연구원, 그들의 가족 등 5만여명이 살고 있었을 뿐 아니라 100㎞ 이내에는 우크라이나 공화국 수도 키예프가 있었다.

이 사고로 히로시마 원자 폭탄의 약 400배 방사능이 유출됐고 공식 사망자만 약 3500명으로 기록됐다. 2000개 마을이 방사선 피해를 받아 40만명 이상이 암과 기형 등 후유증으로 고통받았으며 원전 주변 30㎞ 이내 주민들은 강제 이주됐다. 발생 당일 방사성 물질이 스웨덴까지 날아갔고, 낙진은 전 유럽은 물론 일본과 홍콩까지 떨어진 것으로 전해진다.

인류 역사상 최악의 원전 폭발 사고 현장에 가장 먼저 도착한 이들은 14명의 소방대원이었다. 이어 체르노빌 소방대가 후속으로 도착했고 다 함께 전력으로 진화 작업을 벌였다. 이후 키예프 소방여단과 교대할 때까지 방사선 방호복도 없이 사투를 펼친 이들은 엄청난 방사선에 노출돼 끔찍한 죽음을 맞는다. 방사능 수치가 높아 그 자리에서 쓰러지는 동료들이 나오는 와중에도 소방관들은 목숨을 걸고 오전 5시까지 대부분의 화재를 진압했다. 후에도 이들은 남아 현장 정리작업까지 마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고온 방사능 오염수로 뛰어든 3명의 영웅

재앙 속에서 피어난 숭고한 희생은 더 있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수많은 이들의 목숨과 인류가 수십 년 이상 감내해야 할 피해를 막기 위해 죽음을 무릅쓴 이들. 영화 ‘체르노빌 1986’은 실제로 원전 2차 폭발을 막기 위해 방사능 오염수에 뛰어든 세 남자의 이야기를 모티브로 했다. 영화 속 주인공들은 실존 인물인 알렉세이 아나넨코, 발레리 베스파로프, 보리스 바라노프의 이름을 그대로 따왔다.

이들이 없었다면 체르노빌 원전 폭발 사고는 더 끔찍한 비극이 될 수 있었다. 사고 직후 전문가들은 녹아내리는 노심과 방사성 물질이 원전 지하에 고인 냉각수 및 소화수와 만날 경우 수천도 이상 고열의 물이 한순간에 증발해 증기 폭발을 일으킬 것이라고 예측했다. 만약 그렇게 되면 주변 원자로 3기까지 훼손시키는 것은 물론 지하수를 통한 광범위한 오염이 일어나 더는 수습이 불가능한 상황으로 치닫는다. 이를 막기 위해서는 누군가 고온의 방사능 오염수에 뛰어들어 펌프를 가동해야만 했다. 자진해서 나선 것은 3명의 엔지니어였다.

임무에 참여했던 아나넨코의 증언에 따르면 이들 3명은 3m 깊이의 발전소 지하에 들어가서 밸브 2개를 열어야 했다. 이를 위해 방사능 오염수가 들어찬 001번 복도를 지나가야 했기에 가슴과 발목 언저리에 X선 측정기를 착용하고, 밸브의 플라이휠이 폭발로 날아갔을 것을 대비해 가스 압력식 열쇠도 준비했다. 구간 진입 과정에서 고방사선 구간이 나오자 전력 질주해서 통과하는 수밖에 없을 정도로 장비는 열악했다. 작업 도중 대량의 방사선 피폭자들이 증언하던 금속 맛이 입안에서 느껴졌다고 이들은 말했다.

이 영화는 러시아에서 최초로 체르노빌 원전 폭발 사고를 다룬 블록버스터다. 주연과 감독을 동시에 맡은 다닐라 코즐로브스키와 제작자들은 소방관, 의사, 엔지니어, 목격자들을 직접 인터뷰했다. 또 지하 방사능 오염수 촬영을 위해 촬영감독을 포함, 촬영에 관련된 모든 사람이 다이버 인증을 받기 위해 몇 달 동안 이론·실습 등 교육을 받아 리얼리티를 살린 것으로 전해졌다. 주인공인 소방관 알렉세이 역이자 감독 코즐로브스키는 “체르노빌 1986은 희생에 대한 영화”라면서 “그와 동시에 사람들과 가족에 대한 영화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현재 진행형 이슈인 원전

최근 일본 원전 오염수 처리 문제, 현 정부의 탈원전 정책 관련 갈등 등 원전은 우리에게 익숙한 이슈일 뿐 아니라 세계인에게도 현재 진행형인 사안이다. 영화는 체르노빌 원전 사고를 실제와 가깝게 관객들에게 보여줌으로써 원전 문제를 다룰 때 가장 먼저 고려돼야 할 원전 사고 위험성을 강조했다.

원전 사고는 예측이 불가능할 뿐 아니라 벌어지면 오랜 기간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긴다. 올해로 35년이 지났지만, 체르노빌은 아직도 공포와 후유증에 시달린다. 지난 5월 러시아 국영통신사 리아노보스티통신은 과학전문지 ‘사이언스’를 인용해 사고 직후 콘크리트로 덮어씌운 원전 원자로실 내부 우라늄 연료 덩어리에서 다시 핵분열이 시작되고 있다고 보도했다. 2011년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고로 발전소 부지 저장탱크에 보관 중이던 방사능 오염수 126만t을 바다에 방출하겠다는 일본 정부의 발표 이후 우리나라는 물론 주변국의 우려는 커지고 있다.

작업을 끝내고 방사능 피폭으로 엉망이 된 알렉세이. 올가(오크사나 아킨쉬나)는 그가 어떤 일을 하고 돌아왔는지 듣고 나서 병원을 찾는다. 방호복을 벗고 그에게 안기는 올가. 방사선 노출 환자들의 머리를 깎아주는 일을 하다가도 온몸을 비누로 씻어내던 그녀였다. 희생을 자처한 그에게 느끼는 한없는 감사함이 전해지는 장면이다. 영화는 ‘체르노빌 해체작업자들에게 이 영화를 바친다’는 자막으로 마무리된다. 이들 외에도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소련의 군인들과 관계자들이 사고 당시 오염 확산을 막다가 숨졌으며, 이들의 용기는 소련과 유럽, 전 세계를 구했다.


조성민 기자 josungmin@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