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서울 가서 사람을 만나면 마음이 어두워지고 집에 와서 山川(산천)을 맞으면 마음이 밝아집니다. 이렇다면 내 마음이 病(병)난 겁니까 서울이 病난 겁니까…. 봄이 옵니다 꼭 봄이 옵니다.’
검은 목탄이 조금씩 부서지며 지나간 자리는 일상 속에 흘려보내던 마음의 물길을 잡아세우는 글귀가 됐다. 그 아래엔 선 몇 줄로 간단하게 그려진 지붕과 기둥이 집을 표현하고 있다. 미색의 바탕과 목탄 가루가 진하게 또는 연하게 묻은 검정색, 작가의 낙관이 찍힌 자리의 빨강 외에 어떠한 색도 없다. 커다란 여백이 자리하고 있지만 그림은 조금도 허전하지 않다. 황인기 화백의 드로잉 작품이다.
디지털 산수화라는 획기적 아이디어로 알려져 있는 황인기 화백의 개인전이 오는 7일 서울 종로구 율곡로에 위치한 이화익갤러리에서 시작된다. 이번 전시 제목은 ‘황인기 목탄 그림’. 그간 대형 작품들에 가려져 있던 드로잉 작품들을 집중적으로 선보이자는 기획으로 드로잉을 중심에 둔 전시를 연다. 종이에 목탄으로 그린 드로잉 30여점이 이번 전시의 주인공이다. 30년 가까운 시간 동안 그린 700여개 드로잉 중 30여점을 골랐다.
드로잉 작품들의 특징은 시와 그림이 한데 어우러져 있다는 점이다. 전통 산수화를 현대적 감각으로 그려냈던 작가의 특징이 이번 드로잉 작품들에서도 뿜어져 나온다. 아마추어의 순수함이 담긴 간단한 밑그림, 심상이 담긴 짧은 글귀가 어우러져 특유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한국 전통 문인화가 현대적 감각으로 재탄생한 모습이다.
그가 드로잉에 적어둔 글귀들을 보다 보면 관람객도 사유에 빠진다. 일흔을 맞은 그가 자연을 대하는 태도, 삶과 시간의 흐름을 받아들이는 자세를 담았다. 전시장에서 만난 그는 대형작품을 할 때처럼 사전에 계획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그림을 먼저 그리고 생각나는 글귀를 덧붙이며 드로잉을 완성시켜 나갔다고 한다. 전시장에서 만난 그는 “허연 종이를 놓고 바라보다 보면 모양이 보이고 생각이 나는 것을 그린 뒤 글을 붙였는데, 지나고 보니 내가 사람의 이기심, 자본주의 해악, 죽음 등에 관심을 가졌더라”고 말했다.
글귀들은 내용처럼 가볍게 바람에 날아가듯, 때로는 땅 위에 내려앉거나 물길 따라 흘러가듯 배치돼 있어 시각적으로도 리듬감을 준다.
드로잉이 모처럼 주인공이지만, 전시장에서는 황인기의 상징적인 대형 산수화도 한 점 만날 수 있어 아쉬움을 달래준다. 홀로그램 필름 위에 검은색 실리콘으로 한 점, 한 점 점을 찍어 산수화 형태를 그린 작품이다. 실리콘 점은 디지털 화면의 픽셀처럼 보인다. 홀로그램 필름인 바탕에는 조명 빛과 관람자의 시선이 가는 자리마다 무지개빛깔이 나타난다. 관람객이 다가가고 다시 멀어질 때마다 무지개빛도 움직인다. 마치 해가 뜨고 질 때 자연 풍경 속 하늘이 붉게, 푸르게 물들며 변화하는 것처럼, 홀로그램 산수화도 살아움직이는 듯하다.
작가는 대형 작품을 두고는 자식 키우는 것, 드로잉은 손주 키우는 것에 비유했다. 그 힌트를 숨겨놓은 대형 광목천 작품에 쓰인 글귀가 이렇다. “자식 키우고 먹고 입히고 학교 보내고 버르장머리 가르치느라 애먹고 힘들지만, 손주 키울 때는 졸리면 자게 하고 놀자면 같이 놀아주기만 해도 마음이 흐뭇해진다길래 그건 내가 드로잉할 때 갖는 기분과 똑같다고 했지요.” 다음달 27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