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초 미국에서는 현대자동차가 만든 광고 하나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현대차에는 ‘스마트 파킹(smart park)’이라는 이름의 원격 스마트 주차 보조 기능이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만든 이 광고는 미국 동북부 뉴잉글랜드 지역의 대표적인 도시 보스턴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광고에 등장한 유명 배우들이 보스턴 사람들의 독특한 발음과 억양을 과장되게 흉내 내 웃음을 자아냈는데, 그 보스턴 발음이라는 것이 바로 R 발음을 하지 않는 것이다. 즉, 대부분의 미국인이 car(자동차)를 발음할 때 끝에 혀를 살짝 굴려 R 소리를 낸다면 보스턴을 비롯한 뉴잉글랜드 사람 중에는 R 발음을 전혀 내지 않고 “kah(카)”처럼 발음한다. 따라서 현대차의 광고에 등장한 배우들은 “smaht pahk”처럼 R 발음을 생략하고 발음하는 바람에 재미있는 광고가 된 거다. 그나저나 보스턴 사람들은 왜 R 소리를 내지 않는 걸까.
물론 보스턴 사람들도 R 소리를 전혀 내지 않는 건 아니다. 가령 red(레드)의 R처럼 바로 뒤에 모음이 따라올 경우 R는 발음한다. 즉 car나 smart처럼 R 뒤에 모음이 없는 경우 소위 ‘혀를 굴리는’ R 발음을 넣지 않을 뿐이다. 언어학에서는 이런 R 발음이 되는 단어를 로틱(rhotic, R-음화음)이라 부르고, 그렇지 않은 경우를 비로틱(non-rhotic)이라 부르는데, 잘 알려져 있다시피 R 발음을 하지 않는 대표적인 나라가 영국이다. 영국의 유명 극작가 조지 버나드 쇼는 “미국과 영국은 공통된 언어에 의해 나뉜 두 나라”라고 말한 적이 있다. 같은 언어를 사용하지만 너무나 다른 두 나라를 잘 표현했을 뿐 아니라 R 발음으로 대표되는 두 나라 사람들의 발음, 화법의 차이를 생각해보게 만드는 말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하는 흔한 착각 중 하나가 ‘영어는 영국에서 시작된 언어이니 영국인들의 발음이 정통 발음이고 미국식 영어는 지역의 사투리’라는 생각이다. 언뜻 그렇게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언어학자들에 따르면 영국인들도 16, 17세기까지 대부분 모음 뒤에서도 R 발음을 분명하게 했다. 영국인들 사이에서 R 발음을 생략하는 용법이 처음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흔히 엘리자베스 (여왕) 시대(1558-1603)였다. 영국이 자랑하는 작가 윌리엄 셰익스피어가 활동한 시대와도 겹치는 이때의 기록을 보면 일부에서 R를 발음하지 않는 경향이 나타났다고 한다. 가령 엉덩이를 부르는 arse에서 R 발음을 생략하면서 ass라는 새로운 철자법이 등장했다.
그렇게 나타난 R 발음 생략은 1770년대, 수도 런던을 중심으로 보편화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그때는 미국이 영국으로부터 독립(1776년)한 시점이기도 하다. 영국의 식민지였던 미국이 떨어져 나오는 시점에 영국인들의 발음에서 본격적으로 R 발음이 사라지기 시작한 것이다. “현대 영국인들의 발음보다 미국인들의 발음이 셰익스피어 시대의 영어에 더 가깝다”는, 다소 역설적으로 들리는 말이 나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지만 이는 역설이 아니라 오히려 흔한 현상일 수 있다. 유튜브에서 ‘1970년~2010년대 서울말, 서울 억양의 변화’를 검색해보면 40여년 동안 서울 사람들의 억양이 어떻게 변했는지 들어볼 수 있다. 그런데 1970~80년대의 서울 사람들의 말을 지금 들어보면 오늘날 북한 주민이나 중국 연변 교포들의 억양과 아주 비슷하게 들린다. 그렇게 보면 지금 북한 주민이나 연변 교포의 말이 낯설게 느껴지는 것은 그들이 변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변했기 때문이라고 보는 게 맞다.
마찬가지로 현재 미국과 영국의 발음 차이는 미국인들이 사투리를 사용해서가 아니라 본토 영국인들의 발음이 변했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조금 다른 얘기지만 식물을 연구하는 사람들에 따르면 식물의 변종은 원산지에서 훨씬 더 많이 발견된다고 하는데, 언어에도 비슷한 ‘본토 효과’가 생긴 것은 아닐까 싶다. 그렇다면 그런 본토 효과는 왜 생기는 걸까.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게 해주는 예가 교포 청년들의 한국어다. 가령 미국에서 태어났지만 집에서 한국어를 사용했기 때문에 별 어려움 없이 한국어를 구사하는 교포 10대, 20대의 말을 들어보면 어딘가 모르게 요즘 사람 같지 않지 않게 느껴지곤 한. 그 이유는 그들의 부모를 만나면 알 수 있다. 교포 청년들의 말투는 자신 부모의 말투다. 그런데 그 부모는 수십 년 전에 미국으로 건너갔고, 그곳에서 영어를 구사하며 살아온 사람들이다. 따라서 그들은 (앞서 유튜브에서 확인할 수 있듯) 2021년의 한국인들과는 살짝 다른 억양과 화법으로 굳어져 있고, 그 사람들의 자녀는 수십 년 전의 억양을 고스란히 물려받는 것이다.
물론 이런 차이는 영원한 것이 아니고, 한국에 와서 자기 또래와 어울려 1, 2년을 살면 어렵지 않게 고쳐지는 것을 본다. 화법과 억양, 발음은 결국 자신과 가깝게 교류하며 대화하는 사람들을 기준으로 따르고, 변화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보스턴 주민들이 영국인들처럼 R 발음을 하지 않는 것도 다르지 않다. 그림 1은 미국에서도 R 발음을 하지 않는 지역들을 표시한 지도인데, 다섯 개의 지역이 모두 항구 도시임을 알 수 있다. 즉, 미국이 독립한 후에도 영국과 오랜 교역을 하는 과정에서 영국인들의 발음을 자연스럽게 습득한 결과다.
하지만 단순히 옆에서 그렇게 발음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해서 따라 하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특정 발음을 하는 사람들이 좋게 (혹은 낫게) 느껴질 때 무의식중에 따라 할 가능성이 높다. 좀 더 적나라하게 말하면 자신보다 더 힘이 있는 사람이나 상류층에 있는 사람, 즉 준거집단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의 화법을 따른다는 것이다. 미국에서는 1932년부터 1977년 사이에 만들어진 영화들을 분석해서 배우들의 R 발음 사용 여부를 조사한 연구가 있었다. 이 연구에 따르면 20세기 초중반만 해도 배우들이 낮은 계층의 인물을 연기할 때 R 발음을 많이 사용하고, 상류층을 연기할 때나 여성들과 대화할 때는 무의식적으로 R 발음을 생략했다고 한다.
그런데 전반적으로 시대가 바뀌면서 영화에서도 (계층과 상관없이) R 발음을 생략하지 않는 추세가 뚜렷해졌고, 1970년대에 이르면 R를 생략하는 일은 거의 보기 힘들어졌다. 흥미로운 건 R 발음을 하지 않는 것에 대한 계층인식이 1960∼70년대에 뒤바뀌면서 영화 속에서 낮은 계층의 인물들, 저속한 언어를 사용하는 인물들, 그리고 같은 인물이라도 분노를 비롯해 감정적 흥분을 표시할 때 R 발음을 하지 않더라는 것이다. 이렇게 미디어가 촉발한 인식의 변화는 거꾸로 현실에 영향을 주었고, 특히 뉴욕을 중심으로 한 지역에서는 점점 더 많은 사람이 R 발음을 분명하게 하는 쪽으로 변화했다.
언어는 끊임없이 변하고, 언어의 변화는 대개 사회의 변화, 언중의 인식변화에 대한 반영이다. 따라서 어느 쪽이 ‘정통’이냐를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다. 굳이 따지자면 미국 영어가 더 정통에 가깝겠지만, 영국인들이 이에 동의할 리는 만무하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