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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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다니던 해양 쓰레기가 예술로… ‘현실 속 바다내음’ 담다

故 정재철 기획초대전 ‘사랑과 평화’

폐현수막 모아들고 中·유럽 등 여행
소비문화 초월한 자유인 모습 보여
전국 해안가 쓰레기 수집해 재구성
‘국제해양부유사물’ 이름 붙여 전시
미공개 드로잉·화첩 등 24점 선보여
“미술이 시대와 교류하는 방법 고민”
정재철의 현장 프로젝트는 자신의 손에서 빚어지던 어떠한 물건이나 재료가 아닌, 자신의 몸 자체를 매체로 삼아 벌인 예술이었다. 사진은 한여름 1. 아르코미술관 제공

볼링핀, 축구공, 면도기, 태극기, 중국 물통, 헬멧, 임신테스트기, 북한의 신의주 화장품 공장 생산 ‘백화 치약’, 마네킹, 선글라스, 슬리퍼, 북한 만경대 공장에서 생산된 ‘흰쌀 튀기과자’ 봉지, 중국의 캔커피, 남한 맥주 카스 캔.

이 물건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한 예술가가 바다 위, 바닷가 등에서 건져 올리고 주워 모은 쓰레기들이다. 작가는 수집한 해양쓰레기들로 설치작품 ‘블루오션 프로젝트-크라켄 부분’을 만들었다. 해변을 닮은 모습으로 배치된 설치작품은 비슷한 크기끼리 분류해 가지런히 놓인 배열에서 반듯하게 정리된 아름다움을 보여주나 그것이 쓰레기라는 점에서 강렬한 대비를 준다. 바다를 상상할 수 있는 물건들로 된 것도 아닌데, 작품은 그 어떤 재료보다 현실 속 바다 냄새를 강하게 풍긴다.

서울 종로구 동숭길에 위치한 아르코 미술관에서는 지난해 작고한 고 정재철의 작품세계를 조명하는 기획초대전 ‘정재철:사랑과 평화’가 열리고 있다.

 

서울대 조소과를 졸업하고 촉망받던 조각가였던 작가는 1980년대 후반부터 2000년까지 조각 중심 활동을 벌이다 2000년대 중반부터 현장 프로젝트를 벌여 나간다. 현장 프로젝트는 자신의 손에서 빚어지던 어떠한 물건이나 재료가 아닌, 자신의 몸 자체를 매체로 삼아 벌인 예술이었다. 그만의 독특한 개념적, 수행적 미술이었다. 이번 전시는 그의 현장 프로젝트가 중심이 된 전시로, 드로잉, 화첩 등 미공개작 24점, 아카이브 자료 50여점을 선보인다.

제주일화도. 아르코미술관 제공

그 가운데서도 2004년부터 2011년까지 진행된 ‘실크로드 프로젝트’, 2013년부터 2020년까지 벌인 ‘블루오션 프로젝트’가 전시의 주요 두 축으로 자리한다.

그는 한번 쓰고 버려지는 폐현수막을 모아들고 중국과 인도, 중앙아시아, 유럽 등지로 떠난다. 폐현수막으로 각 잡힌 슈트를 지어 입은 그는 주변 시선을 아랑곳하지 않고 당당하게 시위하듯 공항으로 향한다. 이제 그가 여행한 자리마다 폐현수막은 현지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물건으로 재탄생한다. 라오스의 한 시장, 리어카 위에서 과일을 파는 한 여성을 위한 차양막이 되거나, 인력거의 낡아 해진 의자에 덧댈 수 있는 튼튼한 조각천이 된다. 문이 떨어져 없던 낡은 집의 문을 대신하는 가림막이 되기도 한다. ‘△△나이트’, ‘○○월 입주 예정’, ‘낚시대 팝니다’ 등 어디에 쓰였는지 짐작 가는 폐현수막의 한글 문구들은 독특한 무늬가 될 뿐이다. 햇빛가리개로 재탄생한 폐현수막은 디자인도 무늬도 독특한 데다 한낮의 햇빛을 적당히 반사하고 투과시키며 비치는 색이 유난히 아름답다.

그의 행위는 ‘대량생산 대량소비’, 그 이후 생략된 말 ‘대량폐기’를 상기시키려는 몸부림, 또는 강제된 소비문화를 초월한 자유인의 모습처럼 보인다. 미학적 고려는 전혀 없이 대충 아무렇게나 만들어졌다가 금세 버려지는 물건을 모아 가장 쓸모있고 필요한 존재로 재탄생시키는 예술가이기도 하고, 전 지구적 불평등을 보정하기를 포기하지 않는 불굴의 개인이기도 하다.

1층 전시실, 대륙에서 펼친 프로젝트를 보고 나면 2층 전시실에서는 해양에서 펼친 프로젝트를 마주한다. ‘블루오션 프로젝트’다.

전국의 해안가를 다니며 수집한 해양쓰레기를 재구성한 설치작품 ‘블루오션 프로젝트-크라켄 부분’이 강렬한 인상을 준다면, 그 옆에 설치된 영상작품들은 서정적 감성을 불러일으킨다. 영상 ‘수협’, ‘한여름2’, ‘해조류’에서는 그가 해양쓰레기들을 바라보는 시선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플라스틱 폐기물 통은 바다 위에 동동 떠서 밀물을 타고 육지에 떠밀려왔지만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하고 바다와 육지의 경계, 파도 끝자락에서 바닷가 돌들에 부딪혔다 밀려나고 다시 부딪혔다 밀려나기만 한다. 그렇게 제자리걸음을 하는 플라스틱 통을 카메라는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다. 드럼통 속에서 몰래 불에 태워지고 있는 폐기물을 바라보기도 한다. 이 불법 화장식을 촬영하는 카메라의 시선은 드럼통 위로 솟아오르는 불에 멍하니 고정돼 있다.

그는 해양쓰레기들을 더 이상 쓰레기로 부르지 않기로 한다. 그가 붙인 이름은 ‘국제해양부유사물’. 그는 커다란 종이에 태평양을 중심으로 한 지도를 그리고 채색한다. 지도에 남한 땅 해안가마다 수집한 해양부유사물을 표기한다. ‘고리 달린 소형 노란 부력볼. 대만 표시 부력볼로 제주 전역 발견’, ‘중국 일회용 라이터. 노래방 홍보용. 전국 해안에서 발견’, ‘한국 농약병. 내수면으로 유입되었을 듯’ 식이다. 어쩌면 인간만이 경계를 만들고 갈 수 있는 곳과 가지 못하는 곳을 만든다. 경계 너머 공유지인 생태계에 대한 작가의 인식을 보여준다. 작가의 생전 노트에는 해양부유사물 지도를 만들던 시기의 글이 남아 있다

실크로드 프로젝트 기록-카슈가르. 아르코미술관 제공

‘2016년 8월8일. 오합장지 두장을 하나는 가로로, 또 하나는 세로로 벽에 붙여 놓고 가로에는 남한 지도를 그렸다. 북한은 마치 바다처럼 연결해서 푸른색을 칠했다. 北海南島圖(북해남도도)라고 이름 붙이려 하고 있다. 물리적이고 자연적인 섬과 정치사상적 섬을 빗대어 그리려고 했고 막연히 우리나라 영토라고, 같은 민족이라 하면서 남보다 못하게 서로를 대접하는 작태가 보기 싫기 때문이다. 하여간 대륙과 확실히 떨어져 고립되어 있는 것은 분명하다. 자의든 타의든…세로로 세워 그린 지도는 일본, 중국, 필리핀, 동남아 일부가 있는 바다 중심 지도이다. 역시 북한은 바다색으로 메워져 있고, 한국은 섬처럼 보인다. 해류와 국제해양부유사물의 흐름을 파악해보려는 루트맵 정도라 하겠다. 내막은 “海人不二”(해인불이)라는 생각으로 그린 지도이다.’ 지도를 그리며 그는 마음속으로 ‘바다와 인간은 하나’라고 되뇌었다.

미술관 측은 “정재철은 어떻게 미술의 실천이 시대와 교류하고 사회적 상황에 참여하고 개입할 수 있는가를 고민했다”고 설명한다. 또 다른 생전 노트가 눈길을 끈다. ‘2001년 11월9일. 세월은 가고 나이는 먹는데 미술이 뭐냐고 묻는다면 그 질문 때문에 아직도 조각을 하고 있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으니……오른쪽 옆구리는 뜨겁고 왼쪽은 차다. 기세 좋게 타오르는 불길 ……난로 속에 타서 사그라드는 땔감처럼 하루가 저문다.’

이번 전시에는 후세대 연구자와 예술가도 참여해 작품을 선보였다. 연구자 이아영은 정재철이 남긴 작가노트를 발췌, 재구성해 ‘사유의 조각들’을 제작했고, 영상감독 백종관은 정재철이 여행하며 촬영한 영상, 사진기록 등을 재구성해 새 영상 작품 ‘기적소리가 가깝고 자주 들린다’를 내놓았다. 유작을 중심으로 한 회고전 성격에서 벗어나, 정재철이 말하고자 했던 바를 당대로 확장하는 것이 전시의 목표다. 그가 오늘날 더 빛나는 문제의식을 남긴 사람이기 때문이다. 다음달 29일까지.


김예진 기자 yejin@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