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이 올해 고등학교 3학년인데 학원도 못 보내고…. 너무 억울해요, 당한 게.”
10분 넘게 담담히 사기 피해를 설명하던 A(52)씨는 통화 말미에 울먹이며 말을 이었다. 자신의 잘못된 선택으로 가세가 기울었다는 생각에 극단적 선택을 생각한 적도 몇 차례다. “투자만 하면 저절로 먹고살 수 있는 길이 열리니 묻지도 말고 넣으라”는 지인의 소개에 3억5000만원을 투자했다가 수렁에 빠진 지 벌써 4년이 흘렀다.
A씨가 투자한 업체는 말레이시아에 본사를 두고 있는 무등록 다단계 업체 엠비아이(MBI). MBI 조직원들은 “투자금을 내면 지급되는 가상화폐 ‘GRC’의 가치가 시간이 갈수록 저절로 상승한다”며 지인 등 주변사람들을 꼬드겼다. 읍 단위 시골에까지 사무실을 차리고 홍보한 탓에 전국에 피해자만 수만 명, 피해 규모도 조 단위를 넘은 것으로 추산된다.
최근 대법원이 강릉에서 MBI 조직을 이끌었던 김모(56)씨와 안모(60)씨의 사기 혐의에 대해 유죄를 확정했지만, 정작 A씨를 비롯한 피해자들은 돈을 돌려받지 못하고 있다. 범죄피해재산(범죄행위를 통해 피해자들로부터 취득한 재산)을 원칙적으로 몰수·추징할 수 없도록 한 현행법 때문이다. 국내법상 사기 피해자들은 민사소송 등을 통해 개별적으로 범죄피해를 회복해야 한다.
여기도 예외는 있다. 부패재산몰수법 제6조는 ‘피해자가 재산반환청구권 또는 손해배상청구권 등을 행사할 수 없는 등 피해회복이 심히 곤란하다고 인정되는 경우 범죄피해재산을 몰수·추징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법원이 ‘심히 곤란하다고 인정되는 경우’를 소극적으로 해석하면서 실제 범죄피해재산이 국가의 도움을 받아 피해자에게 돌아가는 사례는 극히 드문 것으로 나타났다. 전문가들은 사법부가 좀 더 적극적으로 법을 해석해 범죄피해재산 몰수·추징을 인정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지난해 몰수된 범죄피해재산 고작 ‘65억원’
18일 법조계에 따르면, 검찰이 부패재산몰수법을 적용해 지난해 몰수·추징한 범죄피해재산은 64억9300만원(13건)이다. 올해 1월부터 6월까진 19억3000만원(23건)의 범죄피해재산이 몰수·추징됐다. 몰수·추징된 범죄피해재산 중 실제 피해자에게 돌아간 돈은 지난해 약 51억원, 올해 상반기 32억3000만원이다. 2019년 사기범죄로 인한 재산피해액이 약 24조원인 것을 고려하면 국가를 통한 범죄피해 회복이 거의 이뤄지지 않는 셈이다.
이처럼 국가를 통한 범죄피해 회복이 더딘 건 법원이 범죄피해재산 몰수·추징 명령을 내리는 데 인색하기 때문이란 지적이 나온다. 몰수·추징으로 범죄피해재산이 국가에 귀속되면 피해자가 가해자에게 손해배상청구권을 행사하기 곤란한 점을 감안해 법원은 ‘개인의 재산권 보호’ 측면에서 이를 제한적으로 허용한다.
하지만 점점 피해자의 손해배상청구권이 무의미해지는 시대다. 예컨대 사기꾼이 차명으로 재산을 돌려놓거나 해외로 재산을 빼돌리면 피해자가 민사소송에서 이긴다고 해도 돈을 돌려받을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소송에서 이기는 것도 힘든데, 지난한 싸움을 거쳐 승소한다고 해도 남는 게 없는 셈이다.
◆소극적인 법원…14건 중 1건만 몰수·추징 인용
대법원 판결문 검색 시스템을 통해 올해 상반기 항소심 재판 중 판결문에 ‘범죄피해재산’이 언급된 14건의 판결을 분석한 결과, 범죄피해재산이 환수된 경우는 1건에 불과했다.
유사수신법 위반과 사기 혐의로 기소된 B씨의 재판을 담당한 재판부는 피해자들이 배상명령을 신청했다는 이유로 범죄피해재산 환수를 불허했다. 배상명령은 법원이 형사사건 유죄판결을 내릴 때 범죄행위로 인한 피해 등의 배상을 명령하는 제도로, 피해자는 법원의 배상명령을 통해 빠르게 범죄피해를 회복할 수 있다.
해당 재판부는 “피해자들이 원심 또는 당심에 배상신청을 하는 등에 비추어 볼 때 피해자들에게 피해회복의 의지와 능력이 없다고 보기 어렵다”며 검사의 범죄피해재산 몰수·추징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피해자들은 민사재판까지 진행할 시간과 여력이 없어 법원에 도움을 요청한 것인데, 법원은 피해자들의 구체적인 사정을 헤아리지 않은 채 ‘피해자들에게 피해 회복의 의지와 능력이 있다’며 관행적으로 판단한 것이다.
이진국 아주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현행법은 피해자 보호를 한다고 하면서도 보수적”이라며 “피해회복이 ‘심히’ 곤란하다고 인정되는 경우 대신 피해회복이 ‘단순히’ 어렵다고 인정되는 경우 내지는 ‘피해자 보호를 위해 몰수가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경우’ 등으로 요건을 완화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몰수 가능 범죄 범위 넓히고 독립몰수제 도입해야”
전문가들은 범죄 피해자들이 국가로부터 돈을 돌려받을 수 있는 체계가 형성되려면 예외적으로 범죄피해재산 몰수·추징이 가능한 범죄 범위를 확장하고, 독립몰수제를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승재현 한국형사·법무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다단계 사기나 보이스피싱 범죄 등으로 예외적으로 몰수·추징이 가능한 범죄를 한정하지 말고, 재산범죄가 발생했고 국가가 몰수할 가능성이 있는 재산이라면 국가가 임의 몰수한 뒤 피해자에게 환부해줘야 한다”며 “피해자들이 재산을 회복해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하는 적극적인 사법제도가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유죄판결 없이 재산만 몰수·추징할 수 있도록 하는 독립몰수제를 도입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다. 현행법상 재산 몰수는 부가형이라, 유죄판결을 내릴 때만 함께 몰수·추징 명령을 내릴 수 있다. 이 때문에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재산이 은닉되고, 피해자는 피해를 회복하지 못하는 상황이 반복된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는다.
한국형사소송법학회장인 정웅석 서경대 공공인재학부 교수는 “프랑스는 몰수당하는 사람에게 몰수 대상 재산이 어디서 나왔는지 입증하라고 한다”며 “피고인에게 입증 책임이 있는 것인데, 한국도 이런 요건을 토대로 독립몰수제를 도입하는 방안을 생각해봄 직하다”고 했다. 승재현 연구위원도 “확정판결을 받아야 재산 (몰수) 집행이 가능하다는 건 아날로그적 생각”이라며 “형량을 높이는 것보다 재산을 몰수하는 것이 범죄억제효과가 훨씬 뛰어난 점을 고려할 때 독립몰수제가 도입돼야 한다고 본다”고 말했다.
◆ 몰수·추징 규정 법만 6개… 법 적용 등 실무 혼선
범죄수익 환수와 관련된 국내법의 또 다른 문제점으로는 몰수·추징에 관한 규정이 여러 법에 산재돼 있는 점이 꼽힌다. 몰수·추징을 규정한 국내법만 6개라 법 적용 등 실무과정서 혼란이 유발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몰수·추징에 관한 법을 하나로 통합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한다.
18일 법조계에 따르면 몰수·추징을 규정한 국내법은 △형법 △부패재산몰수법 △공무원범죄몰수법 △마약불법거래방지법 △범죄수익은닉규제법 △불법정치자금몰수법 총 6개다.
이처럼 몰수·추징에 관한 규정이 흩어져 있는 건 특정 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특례법 형식으로 법을 입법하는 땜질식 처방을 반복해와서다. 정웅석 한국형사소송법학회장은 “형법상 몰수·추징이 한 번도 바뀐 적 없다 보니 특례법 형식으로 계속 만든 것”이라고 했다.
개별법으로 몰수·추징을 따로 규정하다 보면, 법마다 법리가 달라 실무에서 혼선이 생길 수 있다. 법마다 ‘범죄수익’을 가리키는 용어도 다르고, 필요적 몰수·추징(반드시 몰수하도록 규정)인지 임의적 몰수·추징(재판부 재량에 따라 판단)인지 여부도 다르다.
‘범죄피해재산’을 각각 다르게 규정하고 있는 부패재산몰수법과 범죄수익은닉규제법이 대표적 사례다. 6개 법 중 이들 법만 범죄피해재산을 언급하고 있는데, 각 법에서 말하는 범죄피해재산의 정의가 다르다. 그러다 보니 부패재산몰수법은 예외적으로 범죄피해재산 몰수·추징이 가능하다고 하지만, 범죄수익은닉규제법은 범죄피해재산 몰수·추징은 어떠한 경우에도 불가능하다고 규정한다.
정웅석 회장은 “(몰수·추징에 대한 법이) 산재돼 있다 보니 통일된 법리가 없다는 게 제일 문제”라며 “형법에 담아 정리하는 게 맞다”고 했다. 이진국 아주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도 “(일이 있을 때마다) 그때그때 입법하다 보니 이런 현상이 나타난 것”이라며 “법제 개편을 통해 충분히 하나의 법으로 통합할 수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