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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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주의인문정원] 독립책방은 무엇으로 사는가

동네의 문화사랑방 역할 톡톡
주민 관심·정부의 뒷받침 절실

스물 넘어서도 인생의 원대한 계획을 세우거나 입신양명 따위를 품은 적이 없었다. 어찌 보면 한심한 청년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저 고요한 삶을 꾸리고 싶던 내겐 목가적인 꿈이 하나 있었는데, 항구 도시의 한갓진 장소에서 작은 책방을 하는 것이었다. 손님은 있어도 좋고 없어도 좋겠다. 손님이 없는 날엔 시집이나 철학책을 뒤적이며 혼자 있다가 저물 무렵 바닷가로 산책을 나가는 것. 오랫동안 그렇게 소박하게 무명으로 사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서울의 사람이 북적이지 않는 골목이나, 경주·전주·남원·거제·강릉·강화·파주 같은 중소도시들, 제주도의 작은 마을에 생긴 독립책방을 만나면 반갑다. 그런 구석진 곳에 숨은 책방을 용케도 알고 찾아오는 독자를 만나는 것도 반가운 일이다. 온라인 서점의 약진과 서점의 대형화 추세 속에서 중고교나 대학교 앞, 그리고 동네마다 한 군데씩은 있던 서점들이 사라진 뒤 하나둘씩 나타난 게 독립책방이다. 독립책방은 주인 혼자서 모든 걸 다 관리하는 동네의 작은 서점이다. 공간의 규모가 작으니 진열한 책의 종수도 적다.

장석주 시인

독립책방이 서울이나 지방 곳곳에서 급격하게 늘어난 것은 2010년대 중반 이후다. 2015년 9월 전국에 70군데쯤이던 독립서점은 2017년 7월엔 257군데로 부쩍 늘어난다. 그 뒤 2년 사이에 문을 닫은 곳은 20군데(7.2%)다. 독립책방이 개점한 뒤 1년 이상 운영한 곳은 204군데(73.6%)다. 2017년 문을 연 독립서점은 31군데(19.1%)인데, 일주일에 한 개꼴로 독립서점이 생겨난 셈이다. 당분간은 독립서점이 늘어날 추세다. 이는 독립서점이 독립출판의 활성화와 깊이 연계되어 있다는 증거이다.

독립책방은 우리 시대 중심의 흩뿌림, 플랫폼의 다변화, 개인 욕구의 분출에 따른 일종의 취향 공동체이다. 서울 망원동의 ‘어쩌다 책방’이나 제주도 종달리의 ‘소심한 책방’ 같은 곳에서 북토크를 한 적이 있다. 독립책방은 대형서점과는 다른 자기만의 색깔이 분명하다. 독립책방은 책방의 콘셉트에 맞춘 워크숍과 프로그램을 꾸리는 곳이 많다. 책방 주인의 안목을 바탕으로 진열되는 책이 다르고, 서점의 분위기나 인테리어도 달랐다. 동네 책방은 여행책, 그림책, SF책, 어린이책, 중고서적, 독립출판물 등으로 쪼개서 한 분야의 책을 집중 진열하고 판매함으로써 대형서점과 차이를 드러낸다. 이런 방식으로 특정 취향의 고객을 모으는 사례가 눈에 띄었다.

독립책방을 꾸리는 한 주인은 제 서점을 ‘동아리방’이라고 말한다. 또 다른 누군가는 ‘사람을 만드는 곳’, ‘위로하고 위로받는 공간’이라고 말한다. 독립책방이 단순히 책을 파는 공간이 아니라는 뜻이다. 독립책방은 독서 모임을 주도하고, 글쓰기 같은 동아리의 거점 공간이다. 작은 공간이라 서점 주인과 독자 사이에 두터운 유대관계가 만들어진다. 독립책방에는 지역에 사는 단골 중심이고, 주인이 독자의 요구와 필요에 맞춘 북큐레이션을 하는 경우도 많다. 북카페나 책바(bar) 형태로 운영하는 독립책방은 책을 읽으며 커피나 맥주를 마시는 휴식과 치유의 공간으로도 관심을 끈다. 동네 책방에서 작가를 초대해 북토크를 하거나 소규모 낭독회를 열어 작가와 독자 사이의 친밀한 소통을 끌어내기도 한다. 독립책방은 독자와 지역을 잇는 커뮤니티 노릇을 하고, 여러 방식으로 동네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는 점만으로도 독립책방이 있어야 할 당위는 또렷하다.

독립책방은 동네의 문화사랑방이나 문화공동체 구실을 한다. 독립책방이 문화 향유의 공간으로, 혹은 주민의 상호 소통 공간으로 우리 삶을 더 풍성하게 만드는 데 기여한다면, 독립책방이 융성할수록 더 살기 좋은 동네가 될 게 분명하다. 하지만 독립책방이 처한 현실은 열악하고, 미래는 불확실하다. 2010년대 이후로 독립책방 중 여러 곳이 책 판매의 부진이나 임차료 부담을 이기지 못하고 문을 닫았다. 그럼에도 독립책방이 꾸준히 생겨나는 추세다. 독립책방은 온라인 서점이나 대형서점과의 차별화를 통한 자생 능력을 길러야만 오래갈 수 있다. 아울러 지역의 문화 거점 공간으로 뿌리를 내리고 융성하려면 지역 주민의 성원과 관심뿐만 아니라 정부의 직간접적인 뒷받침이 절실하다.


장석주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