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국의 소식을 접한 도산 안창호의 장탄식이 가슴을 친다. “나라를 망하게 한 것이 일본도 아니요, 이완용도 아니요, 그것은 나 자신이오. 내가 왜 이완용으로 하여금 조국을 팔기를 허용하였소. 망국의 책임자는 바로 나 자신이오.”
조선이 패망하자 우국지사들은 모두 일본을 손가락질했다. 오직 도산만이 우리 내부로 책임을 돌렸다. 그는 왜 토착왜구로 비난을 받을 언행까지 마다했을까. 조선은 스스로 안보가 무너진 병약한 나라였기 때문이다.
국가 안보는 임진왜란 이전에 이미 와해된 상태였다. 조정에선 장수에게 녹봉조차 주지 않았다. 장수들의 생계수단은 주로 병사들이 양민에게 수탈한 양곡이었다. 장수의 자리는 돈으로 사고파는 거래 품목이었다. 녹봉이 없어도 장수 자리는 인기가 높았다. 자기가 바친 돈보다 더 많은 수탈이 합법적으로 보장된 까닭이다. 병역 대상자를 관리하는 군적도 사라진 지 오래였다. 1553년 군적을 뒤늦게 재정비하려 했으나 그마저 엉터리였다. 율곡은 그때의 실상을 선조에게 상소로 올렸다. “각지의 관청이 책임을 피하기 위해 군적의 수만 채우고 있습니다. 걸인도 수에 넣고, 닭과 개의 이름까지 기록에 넣으니 태반이 빈 장부가 되어버렸습니다.”
결국 임란이 터졌으나 군대에는 싸울 무기가 없었다. 몽둥이와 죽창을 든 조선 병사들이 서양식 조총으로 무장한 왜군에 적수가 될 리 만무했다. 명나라 장수는 조선군을 가장 잘 달아나는 군대라고 희롱했다. 참혹한 7년 전란을 겪고도 지도층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 이후 만주족의 말발굽에 국토가 두 번이나 짓밟혔으나 무비유환(無備有患)의 병증은 외려 더 깊어졌다.
안보 불감증의 병세가 심해진 것은 병의 진단을 잘못 내린 탓이다. 근본 병인은 사회지도층인 양반들이 병역의무를 지지 않은 점이다. 심지어 중인 신분인 아전의 친인척까지 모조리 군역 면제의 특혜를 누렸다. 전쟁 와중에도 부자들은 돈으로 요리조리 징집에서 피해갔다. 국방은 오로지 힘없는 ‘천것들’의 몫이었다. 병인양요와 신미양요 때에도 서양 군대에 맞서 싸운 주력부대는 일반백성인 호랑이 포수들이었다. 한마디로 ‘노(No)’ 노블레스 오블리주 사회였다.
유사 이래 지도층의 솔선과 헌신 없이 안보가 굳건해진 예가 없다. 고대 로마의 귀족들은 전쟁이 터지면 맨 먼저 달려갔다. 제1, 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군 전사자 중 이튼스쿨 출신의 상류층은 2000명에 달했다. 미국도 예외가 아니었다. 6·25전쟁에서 죽거나 다친 미군 장성의 아들은 35명에 이른다. 나라의 혜택을 많이 받은 만큼 많이 돌려줘야 한다는 게 그들의 불문율이었다. 소국 신라가 초강대국 당나라를 물리친 데에도 이런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이 빛을 발했다. 귀족과 장군의 자식들은 전장에서 초개와 같이 목숨을 던졌다.
내년 대선을 앞두고 설익은 모병제 주장들이 다시 터져나온다. 부국강병, 정예부대와 같은 제법 그럴싸한 명분을 내세우지만 그 반대의 위험이 훨씬 높다. 모병제로 전환되면 가난한 집 자녀나 저학력자들이 주로 군대에 갈 것이다. 국방은 고스란히 흙수저의 몫으로 돌아가게 된다. 자신의 자녀들이 군에 가지 않으면 지도층은 안보에 관심조차 갖지 않을 것이다. 가장 중요한 안보문제가 국정 우선순위에서 밀려날 것은 불문가지다. 그것이 바로 패망한 조선의 길이다.
대한민국은 군을 천시한다. 나라 지키는 군인은 푸대접을 받고 호국 영웅마저 인격 살인을 당한다. 대통령마저 “군대 가면 썩는다”는 말을 서슴없이 입에 올릴 정도다. 4급 청와대 행정관이 부르면 육군참모총장이 부리나케 달려간다. 군 복무기간을 싹둑싹둑 무 자르듯 하더니 급기야 모병제 포퓰리즘 망령까지 춤을 춘다. 나사 풀린 작금의 군 기강은 이런 ‘정치 국방’의 업보일 뿐이다.
코로나 백신조차 맞지 못한 청해부대 장병들은 “나라가 우릴 버렸다”고 분노했다. 배 안에서 피가래를 토하며 버틴 한 장병은 “이번 일을 겪으면서 대한민국에서 군인은 못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정말 나라는 누가 지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