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은 2023년까지 시간이 걸리고 기초조사는 2026년 정도에 이뤄질 것으로 보고 있다.”
기증받은 이건희 컬렉션 정리에 대해 국립중앙박물관(중박)이 지난달 밝힌 대강의 시간표다. 등록에 2년 반가량, 기초조사를 마무리하는 데 5년 이상 걸린다는 말이다.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더 걸릴 수도 있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기증된 유물은 9797건 2만1600여 점. 역대 최대의 규모이긴 하다. 그래도 의문은 생긴다. ‘등록’, ‘기초조사’라면 그리 복잡한 작업도 아닐 듯 싶은데 뭘 하길래 시간이 이렇게 필요한 걸까.
이건희 컬렉션뿐 아니라 박물관에 들어간 모든 유물이 거치는 등록, 기초조사는 유물의 정체성을 밝히는 작업이다. 앞으로 유물을 보존, 활용하기 위한 토대를 다지는 시간이기도 하다. 중요만큼 꼼꼼해야겠으나 쉽지 않은 부분이 있다. 중요성에 걸맞은 충실함이 지금도 부족하다는 지적이 있다. 먼 옛날의 산물인 유물들인지라 정체를 밝힐 자료가 충분하지 않다. 게다가 유물 관리가 부실했고, 한편으로는 부실할 수밖에 없었던 과거로부터의 업보일 수도 있다. 여기에 유물 정리에 여전히 관심이 부족한 지금의 현실이 겹친다.
기증 후 컬렉션을 직접 만나는 첫 자리 ‘고故 이건희 회장 기증 명품전’이 한창이다. 기증 발표 후 불과 3개월 만에 연 전시회는 국민적 관심이 쏠린 이건희 컬렉션을 선보이는 자리다. 일종의 상견례인 셈. 긴요한 자리이긴 하나 오가는 정보와 감상은 일단 제한적이다. 기대해 볼 만한 것은 시간이 지나 등록, 기초조사가 진행된 유물의 면모는 보다 풍부하고, 다양하며, 깊을 것이란 사실이다.
이건희 컬렉션뿐 아니라 박물관의 유물 대부분이 그렇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일반 관람객들은 잘 모르는 박물관의 그 시간과 작업을 들여다보자.
◆외형부터 상세정보까지… 정체성 확인의 시간
박물관은 보통 구입, 기증, 발굴을 통해 새로운 소장품을 확보한다. 경로가 어느 것이든 일단 박물관의 새 식구가 되면 꼼꼼한 ‘신체검사’부터 받아야 한다. 크기, 무게 등을 포함한 외형적 특징을 상세하게 파악하는 게 우선이다. 균열과 파손, 부식과 퇴색 등이 어디에, 어떻게, 얼마큼 있는지도 필히 확인해야 한다. 유물의 명칭, 제작 시대, 진위 여부 등을 파악해야 하는 건 물론이다.
이런 정보들이 객관적인 것이라면 여기에 보다 주관적인 것들이 더해진다. 해당 유물과 관련된 학설, 전문가들의 전언, 관련 연구, 전문가 혹은 유명인의 주목할 만한 평가, 전시회에 사용된 패널의 내용 등을 담은 상세정보가 추가된다. 중박 박진우 유물관리부장은 “시간의 경과에 따라 축적되는 정보이기 때문에 유물을 둘러싼 스토리가 훨씬 풍부해질 수 있다”고 말했다. 박물관의 유물 조사는 처음 입수했을 때뿐 아니라 이후에도 정기적으로도 진행되며, 해당 유물을 전시회에 내놓을 때는 보다 집중적으로 이뤄진다.
이런 과정을 통해 기존 정보가 수정되거나, 새로운 사실이 밝혀지기도 한다. 2018년 국립고궁박물관(고박)의 특별전 ‘조선왕실 아기씨의 탄생’을 준비하면서 조선 9대 임금 성종의 태항아리가 내항아리, 태지석, 외항아리, 뚜껑으로 나뉘어 국립민속박물관(민박), 중박, 고박에 각각 보관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을 일례로 들 수 있다. 그 전까지는 성종 태항아리가 흩어져 있다는 것을 알았을 뿐 어디에 있는지는 알지 못했다.
◆잃어버린 뿌리, 출처를 밝혀라
유물의 등록, 기초조사 과정에서 특별히 중요하지만, 그만큼 어려운 것이 출처, 유통 경로의 확인이다. 어디에서 나온 것이며, 어떤 과정을 거쳐 박물관에 들어오게 되었는지를 말한다.
무덤에 묻혀 있다 발굴된 부장품이 많은 고고유물을 두고 골머리를 앓을 때가 많다. 박물관을 관람하다 보면 출처가 적히지 않은 고고유물이 적지 않다. 전문가들의 추정이나 문화재계에서 전해지는 이야기 등을 바탕으로 ‘전(傳)○○’(○○ 지역 출토로 전해짐) 정도로만 파악되기도 한다. 이건희 컬렉션 특별전에 나온 ‘덕산 출토로 전해지는 청동 방울’(국보)이 이런 사례다.
희소성, 예술성 등 유물 각각의 독립적 가치와 별개로 출처 불명은 역사적, 학술적 가치를 반감시킨다는 점에서 아쉬울 수밖에 없는 대목이다. 제작 지역과 시대, 동반 유물과의 관련성을 통해 확인하는 역사적 맥락 등을 파악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는 일제강점기 한반도 전 지역에서 자행되었고, 해방 이후에도 한동안 이어진 도굴, 지금도 종종 발생하는 절도 등과 관련이 깊다. 떳떳하게 유통할 수 없는 유물들이 여러 사람의 손을 거치다 보니 출처가 제대로 전달될 리가 없었던 것이다. 박물관에서 오랫동안 유물 정리를 담당했던 한 전문가는 “출처가 분명치 않으면 명칭, 제작 시대 등 중요 정보들이 엉뚱하게 파악되기도 한다”고 밝혔다.
유물의 출처, 성격을 명확히 하기 위해 관련 문헌, 사진 자료, 발굴 기록 등을 뒤지고 여러 전문가들이 모여 의견을 주고받기도 한다. 하지만 뾰족한 결과를 얻지 못해 일단은 공백으로 남겨두고 훗날 다른 단서가 발견되기를 기약해야 할 때도 적지 않다. 민박 장상교 학예연구관은 “관련 정보, 자료가 없을 때 유물 정리는 정말 힘들다”며 “비슷한 용도라면 외국의 자료까지 찾아보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유물의 성격이나 제작 과정 등을 뒷받침하는 자료가 풍부할 땐 뭘 해도 신바람이 난다”는 한 전문가의 말은 같은 고충을 다르게 표현한 말이다.
◆‘수장고 고고학’을 아십니까
2016년, ‘원주 법천사지 지광국사 현묘탑’(국보)을 장식하던 사자상이 중박 수장고에 보관 중인 사실이 알려졌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으로 빼돌려져 국내에는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던 사자상이었다. 중박이 보관 사실을 확인한 건 2010년이고, 2013년에는 보존처리까지 했다. 하지만 관련 정보는 공유되지 않았고, 지광국사탑을 해체 수리 중이던 국립문화재연구소조차 뒤늦게 이를 파악했다.
유물 관리의 어딘가에 허점이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한 사례다. 소장하고 있는 유물의 존재 혹은 가치, 의미를 오랫동안 알지 못했었고, 알고 난 뒤에도 그 정보가 제대로 공유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이런 현실을 두고 ‘수장고 고고학’이란 말이 회자되기도 한다. 수장고의 유물을 잘 정리하면 존재 자체를 몰랐던 유물을 발견하거나, 유물의 가치를 재발견할 수 있다는 의미다. 철저한 유물 관리의 중요성을 촉구하는 말인 동시에 그것이 제대로 이뤄지고 있지 않음을 비꼬는 말이기도 하다. 유물을 보관하고, 연구하고, 전시하는 게 업무인 박물관에서 자기들이 무엇을 가지고 있는지, 어떤 가치를 가진 것인지를 모르는 이런 상황은 어째서 발생하는 걸까.
일단은 우리의 곡절 많은 현대사와 관련이 깊다. 해방과 함께 일제가 관리하던 유물들을 급작스럽게 돌려받았으니 인수, 인계가 제대로 될 리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6·25전쟁이란 큰 혼란을 맞았다. 행방이 묘연해진 유물이 있었고, 흩어지거나 유실된 관련 기록이 숱하게 많았다. 문제를 좀 더 빨리 인식하고, 바로잡으려 노력했다면 좋았겠으나 그럴 여력조차 낼 수 없는 가난한 시절을 오래 살기도 했다. 생각지도 못한 장소에서 유물의 존재가 드러날 때가 있는 건 이런 사정에서 비롯되는 바가 크다.
유물 관리에 대한 상대적인 무관심을 지적하는 목소리도 있다. 박물관의 시작이 유물이고, 등록·기초조사는 유물 관리의 기본. 이런 이유로 당연히 해야 할 일로만 여겨지지 그것에 대한 적극적인 평가, 투자, 보상에는 인색하다는 것이다. 인력이나 재원이 부족한 대학, 사립 박물관의 경우에는 그 정도가 더욱 심해 발굴로 확보한 유물 정리의 기초인 보고서 간행조차 못하는 사례가 드물지 않다.
한 문화재 전문가는 “1년 정도만 지나면 구닥다리 취급을 받을 수 있는 영상콘텐츠 만들라고 수십억원의 예산을 배정하면서 유물 관리에는 인색하기 짝이 없다”며 “기관 평가를 할 때도 관람객 수처럼 드러나는 기준만 적용하니 유물 정리는 소외될 수밖에 없는 것 아니냐”고 목소리를 높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