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메뉴 보기 검색

밀원 감소에 기상이변 겹쳐… 벌통에서 꿀이 사라진다 [심층기획 - 위기의 양봉업계]

봄철 많은 비·저온 탓 꿀벌 활동부진
천연 꿀 생산량 4년새 15.6%로 ‘뚝’

아까시나무 노후화로 꿀 생성 저하
은퇴자 몰려 벌 개체 수는 되레 증가

밀원식물 다양화로 위험 분산 필요
농진청, 디지털 기술 접목 연구 착수
봄철 잦은 비와 낮은 기온 등 기후변화로 꿀벌 활동이 제한됨에 따라 올해 벌꿀 생산량이 평년의 20∼30% 수준으로 급감할 전망이다. 한국양봉협회 제공

“40년 양봉하면서 이렇게 꿀이 나오지 않은 건 처음입니다. 평년의 4분의 1 정도밖에 못 땄어요. 퇴직하고 귀향해 양봉 시작했던 사람들이 줄줄이 양봉을 접고 있습니다.”

 

양봉 농가들이 비명을 지르고 있다. 기후변화 영향으로 지난해에 이어 올해까지 꿀 생산량이 크게 줄었다. 올해 아카시아꿀과 잡화꿀 모두 평년 생산량의 20∼30% 수준에 그칠 것으로 업계는 보고 있다.

 

양봉은 다른 농업과 구분되는 특성이 있다. 꿀을 얻기 위해 키우는 벌은 전 세계 과채 수분의 70%를 담당할 정도로 생태계에서 중요한 존재 의미를 지닌다. 양봉 농가들은 이러한 공익적 가치를 고려해서라도 정부가 양봉업계 피해 보전 등 적극적인 지원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정부는 지난해 8월 ‘양봉산업의 육성 및 지원에 관한 법률’ 시행을 계기로 이제 막 양봉산업 육성을 위한 첫발을 떼고 있다.

 

◆아까시나무와 봄 날씨에 달린 국내 양봉

국내 양봉은 아카시아꿀에 70∼80%를 의존하고 있다. 따라서 아까시나무 꽃이 피는 봄철 꿀벌 활동에 1년 농사가 좌우된다. 한국양봉협회에 따르면 천연 꿀 생산량은 2016년 2만9785t에서 2018년 1만592t, 지난해 4643t으로 줄었다. 4년 새 15.6%로 쪼그라든 것이다.

가장 큰 원인은 역시 기후변화다.

올해 5월엔 비가 많이 왔다. 남부지방은 한 달간 18일, 중부지방은 16일 비가 왔다. 꿀벌은 비가 오면 꿀을 따러 갈 수 없다. 비 온 다음날은 추웠다. 꿀벌 활동이 부진할 수밖에 없었다.

지난해엔 봄철 저온현상으로 아까시나무 꽃눈이 얼어 꽃도 제대로 피지 않았다. 날씨가 너무 춥거나 너무 더우면 벌들이 폐사할 수 있다. 지구촌 기상이변은 벌이 생존하고 활동하기에 최악의 환경이 되어가고 있다.

하지만 농가와 전문가들은 기후변화 이전에도 국내 꿀 생산량이 감소 추세에 있었다고 말한다. 주요 밀원인 아까시나무가 줄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 산림에 풍부한 아까시나무는 6·25 이후 국토재건, 산림녹화 사업을 통해 심어졌다. 풍부한 밀원에 힘입어 한국 양봉이 성장했고, 아카시아꿀은 한국 꿀을 대표하게 됐다.

 

그러나 국내 아까시나무는 이제 수령이 40∼70년 정도로 늙었다. 꽃의 꿀 생성이 이전처럼 왕성하지 않다. 뿌리를 넓게 뻗는 특성상 주변 나무나 산소에 피해를 줄 수 있어 산주들이 선호하지 않는 바람에 산림개발 시 먼저 베어진다.

밀원은 줄어드는데 벌 개체 수는 늘어나면서 봉군(벌통)당 생산량은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비교적 적은 초기비용으로 시작할 수 있는 양봉업에 은퇴자들이 몰려들면서 양봉 농가는 2014년 2만1214가구에서 2019년 2만9026가구로, 봉군 수는 같은 기간 195만2962개에서 274만4141개로 늘었다. 전 세계가 벌 개체 수 감소를 걱정하는 가운데 한국은 세계 1위의 꿀벌 밀도를 자랑한다.

밀원 감소에다 기상이변까지 덮쳐 사상 최대의 위기에 처한 국내 양봉 농가들은 정부에 대책 마련을 촉구하고 있다.

윤화현 한국양봉협회장은 “심각한 경영난에 처한 양봉 농가를 위해 내년까지 벌을 유지할 수 있도록 먹이(설탕)라도 지원해주기를 바란다”며 “아울러 충분한 밀원을 확보하도록 신속히 노력해 달라”고 강조했다.

 

◆밀원 다양화·디지털 양봉으로 기후변화 극복해야

한철 기상악화 때문에 1년 농사를 망치지 않으려면 아까시나무 의존도를 낮추고 계절마다 밀원을 다양화해 위험을 분산할 필요가 있다.

산림청에서도 이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지금까지는 탄소중립, 목재생산 등을 위한 나무 심기에 주력했지만 지난해 양봉산업 육성법이 시행됨에 따라 밀원수 확보가 제도화됐기 때문이다. 양봉협회에 따르면 한국에는 200여종에 달하는 밀원식물이 있다.

윤 회장은 “국토의 67%를 차지하는 산림을 이용해 전국에 다양한 밀원을 조성한다면, 벌꿀 생산량이 증가해 국내 시장에서의 가격경쟁력은 물론 다양한 양봉 산물 브랜드화로 세계 시장에서 제품 경쟁력을 갖출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지금까지 양봉업은 정책적으로 축산업, 양잠산업에 포함돼 존재감이 미미했으나, 양봉산업 육성법 제정에 이어 지난해 7월 농촌진흥청 내 ‘양봉생태과’가 신설되면서 본격적인 지원정책, 연구·개발 기반이 마련됐다.

농진청 산하 농업과학원은 양봉산업 육성을 위해 기존 밀원을 보호하고 기후에 맞는 차세대 밀원식물과 적절한 관리기술을 연구할 계획이다. 또 농가의 수익 안정을 위해 국내 양봉산업 현장에 맞는 디지털 양봉을 연구·도입한다.

지금까지 이동 양봉 농가들이 밀원을 따라 한 지역에 몰리면서 생산성이 떨어지는 문제가 발생했다. 농진청은 정보통신기술을 활용해 농가들에 전국의 밀원 현황, 기상, 봉군 이동 현황 등 정보를 제공해 농가들을 분산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벌 관리기술에도 디지털 기술을 접목한다. 아울러 농진청은 양봉산업 육성을 위해 기상청, 산림청과 협력을 강화할 방침이다.

농진청 관계자는 “한국 벌꿀은 기술적으로나 영양학적으로나 세계 최고 수준임에도 그간 산업과 제도적 기반이 약해 크게 성장하지 못했다”며 “앞으로 한국 양봉이 밀원 확대와 다양화, 디지털 양봉 등을 통해 기후변화 위기를 극복하고 나아가 세계적 경쟁력을 갖출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혔다.

 

◆개량종 ‘장원벌’ 서양종보다 꿀 생산량 67% 많아

 

국내 꿀벌은 크게 재래종과 개량종으로 나뉜다. 토종벌로 불리는 재래종은 동남아 지역에 분포하는 토착종이다. 삼국사기에 기록돼 있을 정도로 한반도에서 오랜 역사를 자랑한다. 개량종은 1900년대 양봉 목적으로 들여온 서양꿀벌종이다.

 

종이 다른 두 꿀벌은 신체 특징, 좋아하는 꽃, 분비되는 효소 등에도 차이가 있다. 그래서 꿀맛도 다르다. 서양종은 아카시아꿀, 밤꿀 등 단일 꿀 생산이 가능하며 토종벌은 여러 가지 꽃에서 딴 잡화꿀 형태로 생산된다.

 

국내 양봉업은 2009년부터 일명 ‘꿀벌 에이즈’로 불리는 낭충봉아부패병의 확산으로 위기를 맞는다. 이 병은 꿀벌 유충에 발생하는 바이러스성 전염병으로 감염된 유충은 번데기가 되지 못하고 말라 죽는다. 확산 속도가 매우 빠른데 토종벌이 특히 취약했다. 2009∼2011년 낭충봉아부패병 확산으로 정부 통계 75%, 농가 추산 95%의 토종벌이 폐사했다.

 

양봉업계에서는 꿀벌 관리기술 개발과 약제는 물론 질병에 강한 꿀벌 품종을 육성할 필요성이 제기됐다.

 

이에 농촌진흥청에서 개발한 것이 한라벌과 장원벌이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10년 이상 연구를 통해 개발된 개량종인 장원벌은 수확률을 높인 품종이다. 국내 농가에서 사육 중인 서양종 꿀벌과 생산량을 비교한 결과 벌꿀이 기존 봉군 대비 최고 31∼67%, 로열젤리가 21% 증산돼 농가 소득향상에 크게 기여할 수 있게 됐다. 또 과채류 화분 매개 효과와 질병저항성이 기존 사육 봉군과 비교해 우수하며 성격이 온순해 양봉 농가에서 관리하기 쉬운 것이 특징이다.

 

농진청은 장원벌이 농가에 확대 보급될 경우 벌꿀 생산액이 연간 약 700억원 증가할 것으로 보고 꿀벌장려품종지정을 위한 훈령(안)을 제작해 보급을 진행했다.

 

장원벌은 실제 양봉 농가들의 소득 증대에 기여한 것으로 평가돼 2018년 신기술시범사업 성과 평가 대상을 받기도 하였다.

 

이후 개발된 한라벌은 낭충봉아부패병 저항성이 있는 토종벌 우수 계통이다. 2016~2017년 토종벌 중 질병저항성을 가지고 있는 계통(R, H계통)을 선발해 각각을 모계와 부계로 이용해 질병저항성이 가장 우수한 교배종인 RH계통을 개발했다. 한라벌은 낭충봉아부패병에 완전한 저항성을 갖고 있어 바이러스에 감염돼도 병증이 발생하지 않는다.

 

2019년도 신기술시범사업을 통해 기존 장원벌 보급과 동일한 방법으로 전국 농가에 확대 보급했다. 지난해까지 누적 8000봉군 이상 보급되었다.

 

토종벌 낭충봉아부패병 저항성 계통 개발은 전 세계에서도 사례가 없는 독보적 성과로 평가된다.

 

꿀벌 신품종 개발을 주도한 최용수 국립농업과학원 연구관은 “한라벌 보급을 통해 10년 전 폐사한 토종벌 개체 수를 2∼3년 안에 회복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면서 “질병저항성과 생산성을 높인 우수 꿀벌 품종 개발이 국내 꿀벌 산업의 새로운 성장기반을 마련할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혔다.


김희원 기자 azahoit@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