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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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한 요리’ 나눠먹던 몰락한 양반가 … 푸근한 정감 [김셰프의 씨네퀴진]

닭백숙의 역사
삼국시대 이전부터 있어
1950년대후엔 삼계탕 유행

프랑스엔 ‘풀레로티’
즐거운 파티 자리
노릇하게 구운 통닭 한마리
온 가족이 모여 함께 먹어

옛날에는 으레 귀한 손님이나 또는 좋은 일이 있을 때면 항상 닭 한 마리를 삶아 대접했다. 냉장, 유통이 어려운 시절 집집마다 키우던 토종닭들은 유통기한이 긴 양질의 단백질이자 재산이었을 것이다. 영화 ‘관상’에서 닭백숙을 먹는 세 주인공의 모습은 마치 하나의 풍속화를 보는 듯하다.

영화 ‘관상’에서 닭백숙을 먹는 장면

#영화 ‘관상’

“관상가 양반, 어찌 내가 왕이 될 상인가?” 읽기만 해도 바로 음성 스트리밍이 되는 것 같은 이 대사는 영화 ‘관상’에서 수양대군 역을 맡은 이정재가 관상가 역을 맡은 송강호에게 던지는 명대사다.

영화 관상은, 실제로 있었던 ‘계유정난’이라는 한 역사에 ‘관상’이라는 흥미로운 요소를 더해 관상가 ‘내경’이라는 가상의 인물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다. 조카를 몰아내고 왕위를 찬탈한 세조의 이야기는 다소 무거울 수밖에 없는데, 영화 초중반 내내 주인공 송강호와 처남 역을 맡은 조정석의 케미는 시종일관 미소를 짓기에 부족함이 없다.

몰락한 양반가 집안에 내경과 아들 진형, 처남 팽헌은 산에서 붓을 만들며 근근이 삶을 이어가고 있다. 사실 내경은 전국에 이름을 알릴 정도로 유명한 관상가이지만 아들 진형의 반대로 그 능력을 펼치지 못한다. 몰락했을지언정 양반의 체통을 중요시하며 진형은 벼슬의 꿈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 엿보인다.

투탁거리며 사는 세 명에게도 큰 변화가 생긴다. 영화의 첫 장면을 사로잡는 연홍(김혜수)의 등장이다. 연홍은 한양에서 온 관상을 보는 기생으로 내경이 한양으로 올라가 본격적으로 관상을 보게 되는 계기를 만들어 준다. 물론 그 과정에는 사소한 실랑이와 약간의 사기가 있기는 했지만 영화는 관상가 내경의 한양 상경 이야기까지는 아주 유쾌하게 진행된다. 김종서 대감과 관상 보는 일을 하게 되면서 내경의 관상 보는 능력은 아주 유용하게 쓰이며 출세가도를 달린다. 하지만 곧 영화는 역사 속 계유정난 비극의 한복판으로 빠져들게 된다.

#관상의 닭백숙

내경과 연홍의 첫 만남 장면은 정말 국가대표 배우들의 연기의 향연이다. 표정 하나하나 좁은 공간에서 오가는 말 한마디가 앞으로 볼 스토리에 기대감을 잔뜩 가지게 해준다. 연홍과의 잠깐의 담소로 받은 돈으로 내경과 팽헌은 닭백숙을 준비하며 진형을 기다린다. 팔팔 끓고 있는 무쇠솥에 닭을 휘저으면서도 조정석이 연기한 팽헌의 푼수 같은 행동들은 영화 내내 즐길 수 있는 중요한 오락거리이다.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잘 익은 토종닭의 다리 하나를 쭉 찢어 아들에게 주는 내경, 그리고 나머지 다리 하나를 바라보던 팽헌의 기대감을 무시하듯 자연스럽게 다리를 뜯어 먹는 내경의 능청스러운 연기는 송강호만이 할 수 있는 유니크한 연기 아니었을까 싶다. 허름한 복장이지만 남자 셋이서 옹기종기 둘러앉아 닭백숙을 먹는 모습은 마치 김홍도의 풍속화 속 백성들처럼 꽤 정감 있게 느껴진다. 그들은 앞으로 지금보다 멋진 옷을 입고, 조금 더 높은 자리에 올라가지만 영화가 끝나는 부분까지 셋의 이런 정감 가는 모습은 다시 볼 수가 없어 아쉽다.

#닭백숙과 토종닭

닭백숙의 역사는 삼국 시대부터 시작됐다고 한다. 하지만 청동기 시대부터 닭을 사육했다고 하니 문헌에 기록되진 않았을지라도 아마 삼국 시대 이전부터 닭을 삶아 먹는 방법이 널리 알려지지 않았을까 싶다. 백숙은 양념하지 않고 익힌다는 뜻으로 굳이 닭이 아니라 생선이나 다른 고기를 익힌 것도 백숙이라고 칭할 수 있다. 흔히 닭을 많이 먹기 때문에 닭백숙이라는 말이 입에 잘 달라붙는다. 토종닭은 단순히 삶기만 하면 안 되고 영화처럼 무쇠솥으로 뚜껑을 닫아 마치 압력솥에 조리하는 것처럼 해야 단단하고 질긴 고기를 부드럽게 먹을 수 있다. 토종닭은 뼈가 굵고 육질이 단단한 만큼 국물은 그야말로 기가 막힌다. 뽀얀 국물에 소금 조금만 쳐도 다른 재료가 필요 없는 보양식이 된다.

비슷한 요리로는 삼계탕이 있다. 백숙과 삼계탕은 조리하는 방식이 같은 요리이나 결이 다르다. 백숙은 토종닭이나 큰 닭을 있는 그대로 삶는 반면 삼계탕은 어린 영계에 ‘삼’을 넣어 조리한다. 또 백숙은 역사가 깊지만 삼계탕은 그리 길지가 않다. 일제강점기 요리책인 ‘조선요리제법’에 삼계탕이 처음 명시된다. 1950년 이후에는 토종 닭백숙보다 삼을 넣은 영계백숙인 삼계탕이 더 유행한다. 일제강점기 때 양계업이 크게 성장하고 그때 들여온 개량종이 성장이 느리고 번식이 더딘 토종닭들의 자리를 차지했기 때문이다. 한국전쟁 이후로는 미국에서 들여온 육계들로 인해 한동안 토종닭들은 시골 장터에서나 볼 수 있는 귀한 식재료가 되었다.

하지만 요즘은 토종닭의 개체수 확보와 토종닭 요리를 전문으로 하는 음식점들이 많이 생겨나 조금씩 그 영광의 자리를 되찾아가고 있다. 한국에서 닭백숙이 있다면 프랑스에는 ‘풀레로티’(로스트 치킨)가 있다. 즐거운 파티 자리에 노릇하게 구운 통닭 한 마리를 큰 접시에 담아 들고 나오는데 온 가족이 모여 함께 먹는다는 점에서는 우리랑 다를 바가 없어 보인다.

 

■풀레로티 만들기

<재료>

닭 600g 1마리, 버터 2Ts, 소금 1ts, 사과 50g, 감자 50g, 식빵 30g, 마늘 3톨, 화이트와인 100ml, 양파 100g, 건바질·후추·샐러드유 조금, 조리용 실

<만들기>

① 닭은 꽁지와 날개 끝을 손질 후에 깨끗이 씻어준다. ② 사과, 감자, 마늘, 식빵은 주사위 모양으로 손질 후 샐러드유에 볶아 준다. ③ 닭고기 안에 볶은 야채들을 채워 준 후 조리용 실로 닭을 묶어준다. ④ 닭에 소금 간을 하고 실온에 녹인 버터와 머스타드를 섞어 준 후 닭고기에 고루 발라준다. ⑤ 철망이 있는 오븐 팬에 화이트와인과 슬라이스한 양파 건바질을 넣고 철망 위에 닭고기를 올린 뒤 180도 오븐에 1시간가량 천천히 익혀 준다.

오스테리아 주연 김동기 오너셰프 paychey@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