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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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 물든 아프간 ‘엑소더스’… 1975년 패망 사이공 탈출 방불

카불공항 수천명 몰려서 마비 사태
“미군 총격으로 최소 5명 사망” 보도
탈레반, 대통령궁 장악·승리 과시
비행기 트랩에 매달린 시민들 이슬람 무장단체 탈레반이 20년 만에 아프가니스탄 정권을 탈환하자 공포와 혼란에 빠진 수도 카불 시민들이 16일(현지시간) 하미드 카르자이 국제공항에서 카불을 떠나는 비행기를 타려고 트랩에 매달려 있다. 탈출 행렬이 끝없이 이어지며 공항 운영 자체가 마비되자 미군은 이들을 활주로에서 쫓아내기 위해 경고 사격을 했다. 트위터 캡처

이슬람 무장단체 탈레반이 아프가니스탄 정권을 재장악하자 수도 카불 공항은 탈출을 위해 몰려든 수많은 인파로 아수라장이 됐다. 1975년 남베트남 패망 당시 사이공(현 호찌민) 탈출이 떠오른다는 반응이 많은 가운데 유엔은 16일(현지시간) 안전보장이사회 긴급회의를 열어 아프간 사태를 논의한다.

 

외신에 따르면 이날 시민 수천명이 아프간 탈출을 위해 카불의 하미드 카르자이 국제공항에 몰려들었다. 카불을 떠나는 비행기에 어떻게든 타려는 이들이 트랩에 매달려 있는 모습이 포착됐다. 공항 운영이 마비된 가운데 공항을 경비 중인 미군이 이들을 쫓아내고자 사격을 가해 최소 5명이 숨졌다는 외신 보도까지 전해졌다.

 

전날 탈레반은 대통령궁을 장악하고 탈레반 깃발을 곳곳에 꽂았다. 카불의 미국 대사관에 걸려 있던 성조기도 내려졌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국가안보팀에서 아프간 상황에 관해 보고를 받았으나 그가 뭐라고 언급했는지는 전해지지 않았다. 이에 뉴욕타임스는 “바이든 대통령은 공개적으로 침묵했다”며 “코로나19 백신 성인 70% 접종, 일자리 증가, 초당적 인프라 법안 진전 등 지난 7개월간의 역량이 아프간에서의 마지막 날들로 산산조각이 났다”고 강도 높게 비판했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은 “바이든 대통령이 책임을 지고 하야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아프간 주재 외국 대사관 외교관들이 탈출 러시를 이룬 가운데 한국대사관도 잠정 폐쇄된 데 이어 공관원 대부분이 중동 지역 제3국으로 철수했다. “아프간을 떠나려는 주민과 외국인에게 출국이 허용돼야 한다”는 미 국무부 성명에는 한국 등 65개국 이상이 이름을 올렸다.

◆“고립된 채 살고 싶지 않다” 유화 제스처… 탈레반 달라졌나

 

이슬람 무장 단체 탈레반이 15일(현지시간) 아프가니스탄 전쟁 종전을 선언하며 국제사회에 유화적 제스처를 보냈다. 7년간 아프간을 이끈 아슈라프 가니(사진) 대통령은 일찌감치 패배를 인정하곤 인접국 우즈베키스탄으로 줄행랑쳐 비난 여론이 들끓고 있다. 향후 아프간을 이끌 탈레반 지도자들 면면에 눈길이 쏠린다.

 

로이터통신 등에 따르면 탈레반은 이날 수도 카불 대통령궁까지 장악한 뒤 승리를 선언했다. 모하마드 나임 탈레반 대변인은 “20년간 노력과 희생의 결실을 봤다”고 했다. 다만 그는 “탈레반은 고립된 채 살고 싶지 않다”며 국제사회에 손을 내밀었다. 이어 “어떤 문제든 해결을 위해 모든 국가가 우리와 함께 (협상 테이블에) 앉기를 요청한다”고 덧붙였다.

 

익명을 요구한 탈레반 지도자는 “대원들에게 아프간인들이 일상 생활을 재개하게 하고 민간인들을 겁주지 말라고 명령했다”고 소개했다. 이를 두고 탈레반이 국제사회와의 평화적 관계를 위해 보다 온건한 이미지로 변신을 꾀한다는 분석이 나온다. 실제로 탈레반은 과거 집권기(1996∼2001년)와 같은 인권탄압이 재현될 수 있다는 우려를 의식한 듯 샤리아법(이슬람 율법) 테두리 안에서 여성 및 소수자의 권리와 표현의 자유를 존중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에 앞서 가니 아프간 대통령은 아내, 두 측근과 함께 우즈베키스탄으로 도피했다. 그는 페이스북을 통해 “수도에서 유혈사태가 발생하지 않도록 나라를 떠나기로 했다”며 “내가 남는다면 수많은 애국자들이 순교하고 카불이 파괴될 것”이란 궤변을 늘어놨다. 아프간인들은 가니 대통령의 배신에 분노하고 있다. 압둘라 압둘라 국가화해최고위원회 의장은 “신이 그에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한 정치인도 “그는 그동안 국민들에게 거짓말했다. 수치스럽다”고 비난했다.

 

이런 가운데 서방 언론은 향후 아프간을 이끌 탈레반 지도부 면면에 주목하고 나섰다. 현재 탈레반 최고 지도자는 하이바툴라 아쿤드자다란 인물이다. 1961년생으로 추정되는 그는 2016년부터 탈레반을 이끌고 있다. 최고 지도자는 정치·종교·군사 관련 중요 결정을 내린다. 이슬람 율법학자 출신인 그는 좀처럼 공식석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가 코로나19로 사망했다는 외신 보도도 있었지만 탈레반은 부인했다.

탈레반 최고지도자 하이바툴라 아쿤드자다(왼쪽)와 2인자 물라 압둘 가니 바라다르. AFP연합뉴스

탈레반 창설자 중 한 명으로 ‘2인자’란 평가를 받는 물라 압둘 가니 바라다르는 성향이 많이 다르다. 그는 탈레반의 외교를 책임지고 있으며 미국 정부 등과의 협상에서 매우 뛰어난 기술을 선보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물라 무하마드 야쿠브는 탈레반 창시자 무하마드 오마르의 아들이다. 30대 초반의 젊은 나이에도 탈레반 군사작전을 총괄하고 있으며, 앞서 여러 차례 최고 지도자 후보로도 거론됐다고 한다. 탈레반 연계 조직 하카니 네트워크를 이끄는 시라주딘 하카니는 탈레반의 재정과 군수물자 조달을 책임지고 있다.

대통령궁 접수 아프가니스탄 정부의 항복을 받아 20년 만에 정권을 탈환한 탈레반 조직원들이 15일(현지시간) 수도 카불에 무혈입성해 아슈라프 가니 대통령이 국외로 도피하며 버려둔 대통령궁을 접수하고 있다. 탈레반은 “아프간 전쟁은 끝났다”며 승리를 선언했다. 카불=AP연합뉴스

◆알카에다도 재기하나… 국제사회 테러 위협 촉각

 

이슬람 무장 단체 탈레반이 아프가니스탄 정부를 몰아내면서 탈레반에 이어 알카에다까지 아프간으로 돌아올 가능성이 커졌다. 국제사회 테러 위협이 고조되리란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BBC방송 등에 따르면 15일(현지시간) 탈레반은 바그람의 옛 미군 기지를 장악한 뒤 기지 내 바그람 교도소 수감자들을 풀어줬다.

 

‘아프간의 관타나모 수용소’로 불리는 이 교도소엔 탈레반과 알카에다, 이슬람국가(IS) 대원 5000명이 수감돼 있었다. 미국은 2012년 교도소 관할권을 아프간에 넘겼다.

 

영국 타임스는 “아프간에서 가장 위험한 수천명이 풀려났다”며 “그중엔 독일군 4명의 목숨을 앗아간 버스 폭탄 테러범, 알카에다를 위해 수백만달러를 세탁한 아랍에미리트(UAE)인, 미 월스트리트저널(WSJ) 기자 다니엘 펄을 납치해 참수한 일당 중 한 명이 포함돼 있다”고 전했다.

 

탈레반의 아프간 장악으로 알카에다 재기는 빨라질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마크 밀리 미 합참의장은 이날 상원 브리핑에서 “탈레반이 아프간을 급속도로 점령해 알카에다 같은 테러 단체들이 예상보다 빨리 아프간에서 재건될 수 있다”고 말했다. CNN방송은 “밀리 의장이 이 상황은 더 큰 대테러 위협을 초래할 수 있다고 인정했다”며 이같이 전했다.

문재인 대통령. 연합뉴스

◆文 대통령 “공관원·교민 철수 최선 다하라”

 

문재인 대통령은 16일 이슬람 무장단체 탈레반의 아프가니스탄 재장악과 관련해 “잔류 공관원과 우리 교민을 마지막 한 분까지 안전하게 철수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라”고 관계 당국에 지시했다고 박경미 청와대 대변인이 서면 브리핑을 통해 밝혔다.

 

정부는 이날 밤 현지에 있는 우리 국민 1명을 철수시킬 계획을 세웠다. 올 초 5명이 남아 있던 아프간 교민 대부분은 지난 6월 정부 요청에 현지를 떠난 것으로 알려졌다. 우리 국민 1명 철수 후 아프간에 잔류 중인 일부 대사관 직원이 철수할지 여부는 결정되지 않았다.

 

수도 카불 주재 한국대사관은 앞서 15일 공관원 대부분이 중동의 제3국으로 긴급 철수해 잠정 폐쇄 상태로 당분간 주변국에서 임시로 업무를 보게 될 것으로 보인다.

 

정부는 탈레반의 수도 진격 속도가 당초 예상보다 훨씬 빠르자 15일 밤 정의용 외교부 장관이 참석한 가운데 본부와 현지 대사관이 2시간 넘게 회의를 하던 중 최태호 아프간 주재 대사에게 우방국의 철수 요청이 있자 긴급히 소개(疏開)를 결정했다. 대사관 직원들은 육로가 막히자 미군 헬기로 카불 공항 내 미군 통제 활주로로 이동했다. 정부는 올해 초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유사시 미군 현지 자산으로 우리 공관원의 제3국 철수를 지원하는 양해각서(MOU)를 체결했다.

 

미국 등 서방 각국도 대사관 직원을 긴급 대피시키는 등 속속 철수에 나섰다. 미 대사관 인력 전원은 카불 도심에서 동북쪽으로 6.5㎞ 떨어진 하미드 카르자이 국제공항으로 피신했다. 탈레반이 카불에 진입하고 아슈라프 가니 아프간 대통령이 망명하면서 대사관의 성조기도 내려졌다고 미국 CNN방송이 15일(현지시간) 보도했다.

 

일본 정부는 대사관 직원 10여명을 소개한다는 방침을 정하고 미국 정부가 자국민 대피에 사용하는 항공기에 탑승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고 일본 NHK방송이 보도했다. NHK에 따르면 영국군 병력은 카불에 도착해 자국민 대피 작전에 돌입했다. 독일, 캐나다, 핀란드는 대사관 폐쇄를 발표했다. 프랑스는 도심 대사관 기능을 공항 인근으로 이동시켰으며, 중동의 아랍에미리트(UAE)에 군을 파견해 자국민 대피 작전을 지원하기로 했다.

 

반면 러시아와 터키 정부는 대사관 잔류 방침을 밝혔다. 러시아 외교부 당국자는 타스통신에 “군사충돌이 일어나고 있지는 않다”며 “위협이 임박하지 않으면 직원 철수는 필요 없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