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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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희창칼럼] 안보는 스스로 지켜야 한다

아프간, 미군 철수하자 곧 무너져
나라 잃은 피란민 목불인견 참상
美 “스스로 싸울 의지 없어 철군”
아프간 사태 반면교사 삼아야

지난 주 아프가니스탄 수도 카불을 탈출하려는 수많은 인파가 북새통을 이룬 카불 국제공항은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다. 미군 수송기에 타려고 트랩에 주렁주렁 매달리고, 일부는 비행기 바퀴에 매달렸다가 떨어져 숨졌다. 철조망이 쳐진 공항 담장 사이로 아기를 미군에게 건네는 모습은 눈물겨웠다. 탈레반의 공포정치를 피해 목숨을 건 탈출 행렬이 이어지고 있다. 무능한 정부가 어떻게 국민을 생지옥으로 몰아넣는지 여실히 보여줬다.

베트남 패망 당시와 데자뷔다. 1975년 4월 30일 베트남 수도 사이공과 떤선녓 공항 사이 6㎞ 구간에서 보여준 탈출 장면과 판박이다. 바다를 떠다니는 ‘보트피플’은 전 세계의 동정을 샀다. 우리나라 상황도 오버랩된다. 6·25전쟁 중이던 1951년 겨울 중공군이 흥남을 점령하자 피란민들은 미군 군함에 매달린 밧줄을 타고 오르느라 안간힘을 썼다. 흥남 철수 장면을 적나라하게 그린 영화 ‘국제시장’은 천만 관객의 눈물을 짓게 했다.

채희창 수석논설위원

아프간의 비극은 자업자득이 아닐 수 없다. 미국은 2001년 ‘테러와의 전쟁’에 나선 이후 2600조원 이상 천문학적인 돈을 아프간에 쏟아부었다. 목숨을 잃은 미군도 2300명이 넘는다. 그럼에도 아프간군에 지원한 돈이 어디로 사라졌는지 모른다고 한다. 서류상 병력은 30만명인데 부패한 관료들이 봉급을 가로채려고 ‘유령 군인’을 만든 탓에 실제론 5만명도 안 된다니 어이가 없다. 탈레반에 무기를 판 군인들도 적지 않다. 대통령은 국민을 내팽개치고 외국으로 줄행랑을 쳤다. 오죽하면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아프간 정부가 포기한 전쟁”이라고 말했겠나.

미국이 영국 등 동맹국들을 아프간 전쟁에 끌어들이고도 너무 쉽게 포기했다는 비판이 적지 않다. 동맹국들의 대미 신뢰도에 흠집이 났다. 미국과 상호방위조약이 폐기된 대만이 동요하는 걸 봐도 그렇다. 하지만 입장을 바꿔놓고 보면 미국의 선택은 불가피한 측면이 강하다. 아무리 도와줘도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아니었나. 미국이 아프간에서 발을 뺀 불편한 진실을 직시해야 한다.

아프간 사태의 교훈은 명확하다. 안보를 다른 나라에 의존하는 건 너무 무모하고 위험하다는 점이다. 바이든 대통령은 “미군은 아프간군이 싸우려 하지 않는 전쟁에서 싸워서도 죽어서도 안 된다” “더 이상 국익이 없는 전쟁에 계속 머무는 실수를 반복하지 않겠다”고 강조했다. ‘국익에 도움이 안 되면 영원한 동맹은 없다’는 메시지를 던진 것이다. 스스로 지키려는 의지가 없는 나라를 끝까지 보호해줄 우방은 어디에도 없다. 이것이 냉엄한 국제현실이다.

우리 내부를 들여다보면 걱정스러운 점이 한둘이 아니다. 북한의 도발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멈춘 적이 없다. 문재인정부들어 한·미동맹은 더 삐걱거리고 있다. 한·미연합훈련은 갈수록 쪼그라들고 있다. 북한 눈치를 보기 때문이다. 부유층에 재난지원금을 주려고 북한이 가장 두려워하는 F35 스텔스기 예산을 2조원 이상 삭감했다. 육·해·공 전군에 성추행 파문이 잇따르는 등 군 기강도 땅에 떨어졌다. 취임 1년도 안 된 국방장관이 7번이나 대국민 사과를 할 정도다.

여권의 인식은 안이하다. 송영길 민주당 대표는 “북한은 모든 무기체계가 낡았다. 남침할 능력은커녕 자신들의 생존과 체제 유지가 더 절박한 실정”이라고 했다. 북한 김여정이 한·미훈련 중단을 압박하자 여권 의원 74명이 연판장까지 돌리며 호응했다. 안보 불감증이 여간 심각한 게 아니다. 나라가 외적에 당하는 건 대부분 지도자들의 방심과 분열 탓이었다. 역사에서 배우지 못하면 비극은 반복된다.

한국은 해방 이후 미국과의 동맹 속에서 나라를 세우고 발전시켜 왔다. 한·미동맹은 한반도 안보의 주춧돌이다. 한·미동맹을 강화하는 게 현명한 선택이지만 그럼에도 명심해야 할 게 있다. 동맹은 서로 주고받는 관계다. 동맹에 군사적, 경제적으로 가치가 있는 국가가 돼야 하는 이유다. 아프간 사태를 타산지석으로 삼아 동맹에 의존하지 않고도 북한이 넘볼 수 없는 강군을 만들어야 한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채희창 수석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