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이사철을 앞둔 전세시장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정부가 수도권 집값 급등세를 꺾기 위해 내놓은 사전청약 확대를 포함한 공급대책이 외려 전세난을 부추길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새 임대차법 시행 이후 급감한 전세 물량을 겨우 붙잡은 세입자는 최근 금융당국의 급작스러운 신용대출·전세자금대출 축소 또는 중단 방침에 혼란스러워 하고 있다. 정부·금융당국의 정책이 전세의 월세 전환을 더욱 가속화해 실수요 무주택 서민의 주거비 부담을 가중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29일 한국부동산원에 따르면, 수도권 아파트 전셋값 상승률은 지난 6월 셋째주부터 10주 연속 0.2%대 상승률을 이어가고 있다. 특히 이달 첫째주와 둘째주 기록한 0.28% 상승률은 2015년 4월 이후 가장 높은 수치다. 민간 통계(KB국민은행)에서는 8월 전국 주택 전셋값 상승률이 1.03%로 올해 들어 처음으로 1%대 상승률을 기록했다.
전셋값 상승세의 원인은 지난해 7월 임대차법 시행 이후 지금까지 계속된 전세 매물부족 현상에다가 방학 등 이사철 수요가 겹친 영향이 크다. 부동산 빅데이터업체 아실에 따르면, 임대차법 시행 직전 5만건 가까이 남아있던 서울 주택 전세 매물은 이날 기준 2만1858건으로 반 토막 났다.
가뜩이나 전셋값이 오르고 매물이 부족한 상황인데 세입자들은 추가적인 비용 부담까지 걱정해야 할 처지다. 늘어난 전세 보증금은 신용대출 등으로 충당해야 하는데 한국은행의 기준금리 인상과 금융당국의 가계대출 규제 방침으로 비싼 이자를 감당할 수밖에 없게 됐다.
이자는 다음 문제고, 대출을 받을 수만 있어도 다행이라는 얘기도 나온다. NH농협은행과 우리은행이 각각 11월과 9월까지 신규 전세대출 등을 중단했다. 다른 은행들은 대출 중단 등 계획이 없다는 게 공식 입장이지만 여러 검토를 진행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고객에게 제공되던 우대금리를 줄이거나 대출 서류 심사를 강화하는 방식으로 개인 대출 문턱도 높아질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최근 정부가 공급대책의 속도 체감을 위해 발표한 사전청약 확대 정책도 세입자들의 발목을 붙잡을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최근 정부는 기존 6만2000가구 규모였던 사전청약 물량을 2024년까지 16만3000가구로 늘렸다. 상대적으로 저렴한 신축 아파트를 미리 청약해놓는 대신 당분간 집을 사지 말라는 취지다. 하지만 사전청약 대기자들이 주택 매매 대신 계속 임대차 시장에 눌러앉아 있을수록 전세 수요는 늘어나는 셈이다. 단기적으로 보면 한정된 매물을 놓고 더 많은 세입자가 경쟁하면서 전셋집 구하기가 더 어려워질 수밖에 없는 구조다. 권대중 명지대 부동산학과 교수는 “기준금리 인상과 사전청약 확대는 장기적으로 집값 상승폭을 줄여주는 데는 도움을 줄 수 있지만, 전세시장의 관점에서는 오히려 악재”라면서 “신규 공급 물량은 그대로 변한 게 없기 때문에 추석 이후에는 본격적으로 전세 문제가 수면 위로 나올 수 있다”고 지적했다.
◆“대출 막차 잡아라” 은행 신용대출 일주일 새 6배 폭증
“연말에 이사 예정인데 그때는 필요한 만큼 대출을 못 받을 것 같아 미리 받으려 합니다”, “대출 막차라고 해서 마이너스통장을 알아보고 있습니다.”
다음 달부터 연봉을 넘는 신용대출을 받기 어렵게 되면서, 불안에 빠진 금융소비자들이 대출에 몰리고 있다. 당장 목돈이 필요하지 않아도 대출을 받아두려는 가수요가 발생하면서 한 주 새 신용대출 증가 폭은 전주 대비 6배로 뛰었다.
29일 금융권에 따르면 5대 은행(KB국민·신한·하나·우리·NH농협)의 26일 현재 신용대출 잔액은 143조1804억원으로 일주일 새 2조8820억원 늘었다. 전주 증가 폭( 4679억원)과 비교하면 6.2배에 달한다.
마이너스통장(한도 대출) 잔액은 26일 기준 51조6749억원으로 전주 대비 2조6921억원 늘었다. 전주 3453억원 늘었던 것과 비교하면 증가 규모가 7.8배 커졌다. 또 같은 기간 5대 은행에서 새로 개설된 마이너스통장이 모두 1만5366개로 전주(9520개)보다 61% 늘었다.
신용대출이 급증한 것은 최근 금융당국의 강력한 가계대출 관리 지침에 따라 은행들이 대출 한도를 대폭 낮추기로 한 영향이다.
5대 은행과 인터넷전문은행인 케이뱅크, 카카오뱅크, 외국계 은행인 씨티은행과 SC제일은행 등은 27일 금융감독원에 신용대출 상품 대부분의 최대한도를 ‘연 소득 이내’로 제한하겠다는 계획을 제출했다. 은행권 시중은행의 대출 한도는 보통 연 소득의 2배다.
은행별로 적용 시점은 다를 수 있지만, 당장 9월부터 대출이 어려워질 것으로 전망된다.
NH농협은행은 신규대출을 중단한 24일부터 신용대출 한도를 연 소득의 100%로 축소했다. 하나은행도 대출 한도 축소를 27일부터 시행 중이고, KB국민은행도 이날 “가계 신용대출 ‘연소득 이내’ 제한을 9월 중 시행 예정”이라고 밝혔다.
나머지 은행들도 내부 협의를 거쳐 9월 중엔 실행하겠다는 계획이다. 모든 은행에서 신용대출 한도가 축소될 경우 당분간 연 소득 이상의 신용대출을 받기 어려워진다. 따라서 한도 축소가 실행되기 전까지 가수요가 더욱 집중될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 말 금융당국의 가계부채 속도 조절 주문에 은행권이 대출 한도 축소와 금리 인상 등을 예고하면서 11월 한 달간 5대 은행 대출이 9조원 이상 늘어난 바 있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한도가 연 소득 이내로 축소되면 고소득자의 경우 대출받을 수 있는 돈이 최소 수천은 적어질 수 있다”면서 “머지않은 미래 목돈이 필요한 직장인과 고소득 전문직 중심으로 가수요가 발생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은행들은 마이너스통장 한도도 기존 1억원가량에서 5000만원 이하로 줄이고 있다. 신한은행과 우리은행은 올 초부터 마이너스통장 한도를 5000만원으로 제한했다. 하나은행은 27일 신용대출 한도 축소와 함께 마이너스통장 한도를 줄였다. KB국민은행은 다음 달 중 시행 예정이며 NH농협은행도 검토 중이다.
신용대출 한도 축소에 이어 10월쯤엔 대출 금리도 오를 전망이어서 금융소비자들의 부담은 더욱 커질 것으로 예상된다.
이날 금융권에 따르면 은행들은 24일 한국은행의 기준금리 인상에 따라 수신(예·적금) 금리를 인상한다.
케이뱅크는 28일부터 정기예금 금리를 0.2%포인트 인상했다. 신한은행은 30일부터 예·적금 금리를 0.2∼0.3%포인트, NH농협은행은 다음 달 1일부터 0.05∼0.25%포인트 올릴 예정이다. KB국민·하나·우리은행·카카오뱅크 등도 조만간 예·적금 금리를 인상할 방침이다.
과거에도 기준금리가 오르면 은행들은 수신금리에 바로 반영하는 경우가 많았다. 예·적금 금리가 상승하면 다음 달 코픽스 금리에 영향을 주기 때문에 코픽스를 기준으로 삼는 시중은행 변동성 대출 금리도 따라 오른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은행들은 최근 기준금리 인상 기대를 선반영해 대출 금리를 올려왔기 때문에 곧바로 추가 인상을 하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면서 “다만 예·적금 금리 상승에 따라 대출 금리가 시차를 두고 상승할 것으로 보이는 데다 한은이 연내 추가 기준금리 인상을 시사한 만큼 은행 대출 금리는 더 인상될 가능성이 높다”고 밝혔다.
◆천정부지 집값에 공공임대 인식 달라진다
“주변 시세를 보면 답이 나온다. 외곽의 노후 20평대 아파트값이나 서울 전세아파트 중위가격이 5억원을 넘긴 지 오래다. 같은 평형대 국민임대는 보증금 몇천만원에 월임대료가 9만원가량이다. 내 집 사기 전까지 돈 모아야죠.”
최근 집값이 지속적으로 상승하고, 청년·신혼부부 등의 취약계층이 접근할 수 있는 저렴한 주택 재고가 급감하면서 공공임대 주택에 대한 인식이 바뀌고 있다. 무주택 서민이 집을 구매하기 전까지 저렴한 임대료에 보증금 인상 부담까지 덜어내고 거주할 수 있는 공공임대의 주거사다리로서의 가치가 재정립되고 있기 때문이다.
29일 KB 리브부동산이 발표한 월간KB주택시장동향 자료에 따르면 지난달 전국 주택매매가격은 1.50% 상승해 전달 1.17%보다 상승 폭이 커졌다. 이는 2006년 12월(1.86%) 이후 14년 8개월 만에 가장 높은 상승률이다.
국민 소득은 이렇게 뛰는 집값을 따라가지 못한 지 오래다.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 2분기 가계소득은 1년 전보다 0.7% 감소해 4년 만에 감소로 전환했다. 상위 20%에 해당하는 5분위 가구를 제외한 모든 가구에서 일제히 소득이 줄었다.
이런 환경 변화가 과거 부정적인 이미지가 우세했던 공공임대에 대한 인식을 바꾸고 있다는 분석이다. 지난 5월 한국토지주택공사가 인공지능·빅데이터 전문기업인 바이브컴퍼니에 의뢰해 30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를 보면, 공공임대 공급을 확대하는 것에 대해 전체 응답자의 64.1%가 긍정적으로 답했다. 반대하는 비율은 6.5%에 불과했다. 또 전체 응답자 중 76.6%가 공공임대주택 거주의향이 있다고 응답했고, 1인 가구는 84.5%에 달했다.
공공임대는 1989년 도입됐다. 88서울올림픽 직후였던 당시 집값과 전셋값이 크게 상승하자 정부는 주택 200만호 건설계획을 발표했고, 이 계획에 기초생활수급자 대상 영구임대주택 도입안이 포함됐다. 1990년 최초의 영구임대단지가 서울 노원구에서 입주했고, 이후 공공임대는 국민임대(매입·전세임대), 행복주택 등으로 다양화하면서 공급을 확대해 도입 24년 만인 2013년에 재고 100만호를 달성했다. 특히 문재인정부는 2017년 11월 주거복지로드맵 발표 이후 지난 3년간 역대 최고 수준인 연평균 14만호의 공공임대주택을 공급했다. 2025년에는 240만호(재고율 10%)가 확보된다.
공급규모가 늘어난 만큼 이제는 공공임대의 품질 제고에 더 신경 써야 할 때라는 말이 나온다. 그래야 장기적인 관점에서의 공급·수요 확대를 통한 주택가격 안정 효과도 기대할 수 있다. 주택건설업계의 한 관계자는 “영국 등 공공주택 선진국에는 고품질 디자인·시설 등으로 거주자 만족도와 자산가치가 높은 공공임대가 있다”며 “집값 과열기마다 공급 확대를 통해 주거안정에 기여했던 공공임대가 이제는 더 많은 중산층이 입주를 희망하는 주택으로 업그레이드되어야 할 시기”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