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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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정미칼럼] 제왕적 대통령은 또 실패했다

승자독식이 낳은 ‘청와대 정부’ 폐해
권력 절제하고 나눌 방안 공론화돼야

더불어민주당이 밀어붙인 ‘언론재갈법’ 파동에 묻히긴 했지만 어제부터 민주당 대선후보 선출을 위한 지역 순회투표가 시작됐다. 국민의힘도 대선 후보를 뽑는 경선 룰 힘겨루기가 한창이다. 6개월 후면 우리는 새 대통령을 맞는다. 이 즈음이면 여러 주자들에 대한 하마평이 오르내리고 제법 화제를 모으는 후보도 있기 마련인데 분위기가 시큰둥하다. 코로나19 장기화로 인한 피로감을 차치하더라도 여야를 막론하고 후보들이 유권자들에 별 감흥을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누가 된다고 한들 무엇이 달라지겠느냐고 낙담하는 이들이 주위에 많다.

대선 레이스가 국민적 관심을 끌지 못하는 데는 여러 요인이 있다. 경선 상대의 약점, 부정적 이미지를 증폭시키는 네거티브 공세나 말꼬리를 잡고 늘어지는 소모전은 고개를 돌리게 한다. ‘망국병’ 지역주의도 소환됐다. 민주당은 1, 2위 후보인 이재명 이낙연 간 ‘명낙대전’이, 국민의힘에서는 1위 주자 윤석열을 중심으로 ‘친윤·반윤’ 신경전이 끊이지 않는다.

황정미 편집인

구경꾼들이 몰리건 말건 자기들끼리 목숨 걸고 싸우는 이유는 일등이 판돈을 싹쓸이할 수 있어서다. 이런 승자독식 제도가 제왕적 대통령을 만들어 나라를 골병들게 한다는 비판이 정권마다 터져나왔지만 달라진 게 없다. 사상 초유의 대통령 탄핵 사태를 겪고 등판한 문재인정부에서는 오히려 공고해졌다. 정치학자 박상훈은 현 정부를 권위주의 정부에나 어울리는 ‘청와대 정부’로 부르면서 역대 어느 정부보다 청와대 파워가 세졌다고 했다. 인력, 규모와 예산이 늘어난 것은 물론 내각과 국회에 미치는 영향력도 커졌다. ‘문파’로 불리는 대통령이 동원할 수 있는 골수 지지층 덕분이다.

월성 원전 1호기 조기폐쇄 사건은 ‘청와대 정부’ 실상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공소장에 대통령, 청와대가 수십번 등장한다. 월성 1호기 경제성 평가 조작 혐의 등으로 기소된 백운규 전 산업부 장관 공소장에는 산업부 실무진과 유관기관 반발을 뭉갠 청와대의 강압적 행태가 적나라하게 담겼다. 월성 1호기 정비 연장 취지의 보고서에 ‘영구 가동 중단은 언제 결정할 계획인가요’라는 대통령의 댓글이 시작이었다.

대통령 댓글 하나가 ‘가동 중단 맞춤형’ 보고를 하라는 청와대 지시로 바뀌었다. 절차와 법적 문제를 지적한 산업부 공무원에 백 전 장관은 “너 죽을래”라며 질책했고, 경제적 손실을 우려한 한국수력원자력 측에 산업부 공무원은 “현 정부에서 월성 1호기가 돌아갈 것 같으냐”고 윽박질렀다. 대통령 댓글 이틀 만에 월성 1호기 즉시 가동 중단 보고서가 만들어졌다. 일련의 과정에서 드러나는 청와대 갑질은 제왕적인 대통령 권력의 민낯이다.

‘검수완박’(검찰수사 완전박탈) ‘언자완박’(언론자유 완전박탈)한다고 권력의 추함이 감춰지진 않는다. 문재인정부는 제왕적 대통령제를 바꿔야 한다는 탄핵의 교훈 대신 적폐청산이라는 깃발을 들고 유례없는 청와대 주도 여론 정치로 대통령제를 더욱 깊은 수렁에 빠트렸다. 대통령이 공언한 소득주도성장, 부동산 가격 안정, 비정규직 없는 세상은 공수표가 된 지 오래다. 탈원전, 검찰·언론과의 전쟁 후과는 다음 정부가 감당해야 한다.

떨어진 대통령제 효능감을 생각하면 개헌론을 무시할 수 없지만 시기적으로 불가능하다. 최소한 무소불위의 청와대 권력만이라도 줄여야 한다. 내심 국민의힘 윤희숙 의원이 비서실장만 남기고 수석제를 폐지하겠다고 밝혔을 때 공론화로 이어지길 기대했다. 하지만 부친의 부동산 투기 의혹에 휘말린 그는 대선 레이스에서 중도 하차했다. 윤 의원의 문제 의식은 유효하다. 정부조직법 14조에 명시된 청와대 법적 근거는 ‘대통령 직무를 보좌하기 위해 대통령 비서실을 둔다.’ ‘비서실에 실장 1명을 두되 실장은 정무직으로 한다.’ 딱 두 조항이다. 이를 근거로 문정부를 비롯한 역대 정부가 복수의 실장, 수석제를 두고 사실상 내각을 무력화한 것이다. 그뿐인가. 여론을 동원해 국민을 쪼개고 갈등하게 했다.

이번에도 제왕적 대통령은 실패했다. 그 전철을 밟지 않으려면 권력을 절제하고 나눌 방법을 찾아야 한다. 진짜 그럴 의지와 용기가 있는 후보라면 말이다.


황정미 편집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