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작나무 꽃말은 ‘당신을 기다립니다’/숲의 요정이 말한다 “내 품에 안겨 지친 영혼 쉬어요”/1시간 넘게 걸어야 만나는 인제 원대리 자작나무숲/은빛 나무껍질에 갈색 속살 북유럽 숲으로 순간이동/슬프고 지칠때 다시 올께
“당신을 기다렸어요. 오랜 시간 먼 길 돌고 돌아 그래도 다시 오셨네요. 이제 품에 안겨요. 슬프고 힘든 기억 모두 놓아요. 행복 가득한 시간으로 그대 가슴 다시 가득 채울게요.” 눈을 감는다. 코끝을 스치는 진한 초록 내음과 사랑하는 이의 손길처럼 섬세하게 머리를 쓰다듬는 부드러운 바람. 자작나무숲은 신비한 요정의 언어로 귓가에 속삭이며 말을 걸어온다. 오랫동안 기다려왔다고. 불안과 시름 모두 녹이는 따뜻한 숲에 안기자 지친 영혼은 리셋 버튼을 누른다.
#속삭이는 자작나무숲으로 가다
강원도 인제 원대리 자작나무숲에 들어섰다. 하얗고 광택이 도는 매끈한 껍질과 갈색 속살이 매우 이국적인 자작나무가 빽빽한 풍경이라니. 시진으로만 보던 북유럽의 숲으로 순간이동한 듯, 신비로운 숲 어디선가 요정들이 튀어나와 팔을 잡아 끌 것 같다. 땀을 뻘뻘 흘리며 오랜 시간 숲길을 걸은 고생을 넉넉하게 보상받는 풍경이다.
원대리 자작나무숲은 쉽게 그 신비로운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한 시간 넘도록 발품을 팔아야 하는 아주 깊은 산속에 은밀하게 숨어있기 때문이다. 숲 입구에서 길이 두 갈래로 나뉜다. 오른쪽은 윗길(원정임도), 왼쪽은 아랫길(원대임도). 윗길은 3.2km로 자작나무숲까지는 약 1시간 거리이고, 아랫길은 3.8km로 더 길어 1시간 30분정도 걸린다. 하지만 아랫길이 평탄하고 윗길이 가팔라 보통 아랫길로 가서 윗길로 내려오는 코스를 택한다. 무릎에 자신 없다면 아랫길을 왕복해도 좋다. 초등학생들도 도전할 수 있을 정도로 쉬운 길이지만, 자작나무숲을 약 1km 남기고는 가파른 계곡으로 바뀌니 너무 얕잡아보면간 낭패다. 체력도 안배하고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며 천천히 오르는 것이 좋다.
아랫길을 따라 오솔길을 걷는다. 세 살쯤 된 아들과 여행에 나선 엄마는 안아달라고 보채는 아이를 업었다 내려놓았다 하며 걷느라 고생이다. 그래도 오붓한 둘만의 시간을 즐기는 얼굴에는 행복이 묻어난다. 다정하게 손잡은 연인들은 숲보다는 서로의 얼굴을 보는 시간이 더 많다. 평탄하던 길은 남은 거리 1.1km를 알리는 이정표 앞 나무다리를 건너면서 바위로 뒤덮인 가파른 등산로로 모습을 바꾼다. 코스 안내도에 붉은색으로 ‘탐험코스’라고 표시된 길이다. 한줌 햇살도 허락하지 않는 울창한 숲의 정적을 깨는 것은 계곡 물 소리와 새소리뿐. 번잡한 생각들은 저절로 정리되며 머리가 가벼워진다. 이끼로 덮인 바위 사이로 흐르는 맑은 계곡 물에 손을 담그니 얼음장처럼 차다.
멍때리며 1시간 30분가량 천천히 걸어 땀이 비 오듯 쏟아질 때쯤 거대한 자작나무숲을 마주한다.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신비롭다. 나를 온통 에워싸며 끝없이 펼쳐진 자작나무숲은 사람이 살지 않는 동화 속 요정의 세상 같다. 윤택이 나는 흰색 옷을 두른 나무는 한 치의 휘어짐 없이 약 20m 높이로 쭉쭉 하늘을 향해 뻗어 올라가 있다. 이곳은 원래 소나무숲이었는데 솔잎혹파리 피해가 심해 모두 베고 1974∼1995년 25ha에 자작나무 69만그루를 심었다. 오랜 시간이 흐르면서 북유럽에서나 볼 수 있는 풍경이 완성됐고 2012년 10월부터 숲은 사람의 발길을 허용했다.
종이처럼 얇게 벗겨지는 껍질은 천년이 지나도 썩지 않는다고 한다. 경주 천마총의 말안장을 장식한 천마도의 재료가 자작나무 껍질이고, 합천 해인사 팔만대장경의 일부도 자작나무로 알려져 있다. 전기가 없던 시절 자작나무 껍질에 불을 붙여 촛불처럼 사용했고, 불에 탈 때 “자작자작” 소리를 내 자작나무라는 이름을 얻었다. 굳이 태울 필요 없다. 숲속 한가운데 서서 눈을 감으면 바람에 스치는 나무들은 “자작자작”거리며 귓가에 속삭인다. 그래서 자작나무는 숲은 ‘속삭이는 숲’이라는 별명도 얻었다.
나무계단이 숲 전망대로 이어주며 어디서 사진을 찍어도 예술작품을 얻는다. 자작나무로 만든 인디언집이 놓인 야외무대 전망대에 서면 한눈에 모두 담을 수 없는 거대한 자작나무 숲이 펼쳐진다. 오른쪽 치유코스로 이어지는 오솔길에서도 인생샷을 건질 수 있다. 인디언집 맞은편 오르막길은 햇살이 밝게 비출 때 자작나무의 윤기 도는 껍질이 더욱 눈부시게 빛나는 환상적인 풍경을 선사한다. 하얀 눈이 내린 겨울에 진풍경을 드러내지만 초록이 울창한 요즘도 자작나무숲의 매력을 즐기기 충분하다. 사실 겨울에는 도전하기 쉽지 않다. 눈과 얼음으로 덮인 가파른 길을 한 시간가량 걸어야 하기에 아이젠은 필수다. 돌아 내려오는 길에는 단 한 사람도 만나지 않는다. 오전 9시부터 오후 3시까지(동절기는 오후 2시)만 입산할 수 있어서다. 덕분에 고요한 숲속을 나 홀로 전세 낸 듯한 자유를 만끽한다. 자작나무는 꽃은 아니지만 꽃말이 있다. 바로 ‘당신을 기다립니다’. 언제나 같은 자리에서 기다려주는 자작나무숲. 치유와 위안이 절실할 때 다시 올게.
#영혼 울리는 백담사 범종 소리 고요히 퍼지고
‘무작정 앞만 보고 가지 마라/ 절벽에 막힌 강물은 뒤로 돌아 전진한다/ 조급히 서두르지 마라 폭포 속 격류도 소(沼)에선 쉴 줄 안다.’ 백담계곡에 놓인 마음을 닦는 수심교(修心橋)를 건너 백담사 금강문으로 들어서면 만나는 시비에는 시인 오세영의 작품 ‘강물’이 담겼다. 단어 하나하나 마음에 잔잔한 여운을 남긴다. 무엇을 위해 쉬지 않고 달려왔을까. 비워 내야 다시 얻을 걸 알면서. 그래, 천년고찰 거닐며 시처럼 마음에 쉼표를 찍어보자.
백담사로 가려면 버스를 타야 한다. 용대마을 정류장에서 백담사까지 영실천을 따라 도로가 나 있지만 7km로 걸어서 두 시간 거리다. 더구나 승용차 교행이 불가능할 정도로 좁고 산책로가 따로 없어 걸어가기 쉽지 않다. 버스는 대략 30분마다 출발하며 18분 정도 걸린다. 오후 5시5분 버스표를 예매하고 인근 영실천 백담계곡을 들러본다. 꽤 깊어 보이는 맑은 물에는 많은 이들이 물놀이를 즐기거나 간이 의자를 놓고 아름다운 풍경을 한가로이 즐긴다. 물이 깊어 구명조끼는 필수다.
물속으로 뛰어들고 싶은 욕구를 참으며 출발 시간 5분 전 정류장에 도착했는데 이런, 버스가 보이지 않는다. 백담사에서 기다리는 손님들이 많아 일찍 출발해버렸단다. 망연자실한 표정을 짓는데 한 남자가 다가와 자신의 승용차로 데려다 주겠단다. 그는 마을에서 운영하는 버스회사 대표. 넉넉한 인심에 일그러진 얼굴은 햇살처럼 다시 펴진다. “저기 보세요 바로 거북바위예요.” 구불구불한 길을 오르며 그가 가리키는 곳을 보니 영락없이 거북이를 닮은 바위가 계곡 한가운데를 지키고 있다. 계곡을 따라 끊임없이 절경이 이어진다. 도로 옆으로 산책로가 건설 중이다. 안전한 걷기여행을 원하는 이들이 많아 연말까지 일부 구간을 개통하고 계속 길을 늘려 갈 예정이란다.
647년(신라 진덕여왕 1) 자장율사가 ‘한계사’로 창건한 백담사는 1783년(정조 7) 지금의 이름을 얻었다. 설악산 대청봉에서 100번째 작은 연못이 있는 지점에 세운 절이라는 뜻이다. 수심교에서 서자 아담한 백담사 전경이 한눈에 들어오고, 계곡을 흐르는 맑은 물과 수많은 사연들이 담긴 돌탑들도 펼쳐진다. 금강문을 지나면 왼쪽에 고풍스런 백담다원, 오른쪽에 범종루가 보이고 가운데 ‘백담사’와 ‘설악산’이 적힌 불이문 뒤로 극락보전이 모습을 드러낸다. 보물 제1182호로 지정된 극락보전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이 온화한 얼굴로 여행자를 바라보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극락보전 오른쪽에는 만해 한용운 선생의 흉상이 기다린다. 그는 백담사에 머무르며 1926년 ‘님의 침묵’을 펴냈다. 만해기념관에 그의 흔적이 가득하다.
오후 5시40분. 힘차게 법고를 두드리는 소리가 산사에 울려 퍼진다. 솜씨 좋은 드럼 연주자의 멋진 공연을 보는 듯하다. 저녁 예불에 앞서 진행되는 의식은 법고에 이어 목어, 운판으로 이어진다. 하이라이트는 범종 타종. 묵직한 범종 소리가 산자락에 부딪혀 메아리를 만들며 온몸을 감싸니 가슴에도 고요한 평화가 찾아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