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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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인희칼럼] 가족, ‘우발적 다원주의’의 생생한 현장

코로나 시대 명절 풍경 많이 변해
본가·처가 따로가거나 ‘휴가’ 즐겨
가족의 상황 따라 유연하게 선택
일시 변화 넘어 공감 가치 실천을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의 인기가 대단한 모양이다. ‘세계인이 열광한 드라마’ ‘드디어 전 세계 83개국에서 1위 달성’ ‘도시락, 달고나, 의상 외 드라마 굿즈도 판매 호조’ 등 관련 소식이 연일 미디어를 장식하고 있으니 말이다. 와중에 한국 시청자 사이에선 호불호가 엇갈린다는 기사에 눈길이 가, 내용을 읽어보았다. 주인공은 저마다 절절하고도 절실한 가족 사연을 간직하고 있는데, 바로 그 점이 한국인들 눈엔 신파로 비쳐 다소 식상하다는 의견이요, 외국인들로부터는 바로 그 가족 스토리로 인해 드라마에 깊이가 생기고 풍성함이 가미됐다는 호평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가족은 한국인에게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일까. 오리무중(五里霧中)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다.

올해 추석도 우리 집에선 차례를 지냈다. 가급적 모임을 자제해 달라는 국가의 권유가 있었지만, 이미 식구 다수가 코로나 백신 2차 접종을 끝마쳤기에 예년처럼 추석 의례를 치렀다. 바로 그날 아침 아파트 현관문을 열고 나가니 50대 중반의 옆집 주인(남자) 홀로 등산복 차림에 배낭을 메고 길을 나서는 것이 아닌가. 순간 추석 날 아침에 등산을 떠나는 사연은 무엇일까, 다른 가족은 어디서 무얼 하고 있을까, 호기심 어린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함인희 이화여대 교수·사회학

그러고 보니 요 몇 년 사이 추석 풍경도 많이 변했다. 특히 작년과 올해는 코로나 팬데믹의 영향을 무시할 수 없을 테지만, 이미 가족을 둘러싸고 고강도 변화가 진행되던 와중에 코로나 상황이 변화의 물꼬를 더욱 확실히 당겼을 가능성이 높을 것 같다.

추석 연휴가 끝나자마자 대학원 학생 중 기혼자를 대상으로 추석을 어떻게 보냈는지 탐문에 들어갔다. 결과는 10인10색으로 나타났다. 실제로 40대 후반 현직 교사는 결혼 초부터 설에는 본가 먼저 가고 추석에는 처가 먼저 가는 관행을 실천에 옮겼다고 했다. 40대 초반 전업 학생은 둘째 아들인 시아버지께서 고향의 큰형 댁에 명절 쇠러 내려가면서 당신 며느리에게는 친정 먼저 다녀와도 좋다고 하시어 그대로 따랐다고 했다.

30대 중반 현직 연구원은 시댁과 친정 모두 너무 먼 데다 굳이 오지 않아도 된다는 말씀에 마지못한 척 서울집에 머물렀는데, 특별히 시부모께는 마음이 왠지 불편했다고 했다. 20대 후반 결혼 4개월 차 신혼의 남학생은 추석 당일 본가도 처가도 가지 않고 부부 둘이서 오붓하게 즐겼다고 했다. 본가 부모께서 섭섭해하셨지만 코로나를 핑계로 넘겼다며 다음해에도 추석은 부부만의 휴가로 보내길 희망한다고 했다. 요즘 신세대 부부는 명절이면 각자 자기 집으로 가서 편하게 지내고 온다는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자신은 구세대임이 분명하다고 넋두리하는 30대 초반 종부(宗婦)도 있었다. 그런가 하면 명절 때마다 “교수님 아무래도 이번 주 수업 참석이 어려울 것 같아요” 하소연하는 며느리 학생들을 향해 “시부모께 학교 수업도 중요하다는 말을 꼭 드리라”며 화를 낸다는 사연을 적은 지방 사립대 교수의 칼럼도 연휴기간 중 읽었다.

이처럼 다채로운 명절 풍경 이외에도 최근 우리네 가족양식 및 친족관계를 통해 투영되고 있는 다양한 양상을 일컬어, 서울대 장경섭 교수는 ‘우발적 다원주의’라 이름 붙인 바 있다.

여기서 ‘우발적 다원주의’란, 개별 가족이 각자 처한 상황에 따라 일면 유연하게 때론 실용적으로 다양한 선택을 함에 따라 겉보기에 다원적 모습을 띠게 되었음을 포착한 개념이다. 다만 ‘다원주의’의 성격이 ‘우발적’이란 점에서, 우리 가족이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지 변화의 방향을 파악하기 어렵고, 무엇을 위해 변화하고 있는지 선택의 기준 또한 찾기 어렵다는 사실은 매우 유감이다.

배려와 보살핌, 희생과 헌신, 양보와 이타주의 등은 오늘날에도 가족의 핵심 가치로 인정받고 있는 목록이다. 어떤 형태로든 다원주의가 확대되고 있음을 환영한다면, 다음의 과제는 개별 가족의 우발적 선택을 넘어 남녀노소 불문하고 모두가 가족의 가치를 공평하고 공정하게 나누어 실천하는 방식을 더욱 열심히 고민해야 할 것 같다. 과도했던 가족 책임으로부터 무조건 벗어나고픈 소극적 자유를 넘어, 모두가 공감하고 공명할 수 있는 가치를 가족 삶 속에 적극 담아낼 때다.


함인희 이화여대 교수 사회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