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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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들녘 뒤덮은 ‘검은 투기’… 식량산업의 갈 길을 묻는다 [밀착취재]

50년 한길 걷던 농부도, 귀농의 꿈 안고 온 청년도 태양광 앞에 무너져

전남 무안·완도 태양광 사업지 풍경
임차농들 하루아침에 땅도 직업도 잃어
태양광단지 들어서면 농지 80%가 소멸
지역경제 토대가 통째로 사라지고 있다
전남 무안군 운남면 인근 간척지에 대규모 태양광 패널이 설치돼 있다.

누렇게 물든 가을 들녘을 바라보는 농부의 얼굴은 내내 무표정했다.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풍경입니다.” 전남 완도군 약산면 농민 정창섭(64)씨는 여문 알곡을 손에 쥔 채 같은 말을 반복했다. 그가 밟고 선 땅을 포함한 약산 일대 농지는 태양광발전 사업지로 지정되며 소멸 위기에 놓였다. 에너지 전환의 당위 앞에 위태로운 남도의 황금들녘과 농민들의 얼굴을 기록했다.

전남 무안군 운남면 인근 간척지에 대규모 태양광 패널이 설치돼 있다.

 

 

정씨는 50년 넘게 약산면에서 벼농사를 지어왔다. 그에게 농토는 일터이자 곧 삶터다. 빌린 땅에서 농사를 짓는 임차농이지만, 소중한 대지를 지키고 먹거리를 생산하는 공익에 종사한다는 자긍심을 느낀다. 그는 자신의 농토가 물이 좋고 일조량이 높아 벼농사 짓기에 최적의 조건을 갖고 있다고 했다. 약산면 관산리와 우두리 일원의 간척농지에 조성될 태양광발전 부지의 면적은 약 165만㎡다. 이 계획대로라면 약산면 전체 농지의 약 60%가 태양광발전소로 덮인다.

농민 정창섭(64)씨가 수확을 앞둔 자신의 농토에 섰다. 그는 황금들녘을 바라보는 내내 무표정했다.
농민 정창섭(64)씨가 수확을 앞둔 알곡을 어루만지고 있다.

정씨처럼 간척농지에서 오래도록 농사일을 이어온 이들에게 위기가 찾아온 건 2년 전 행해진 농지법 개정 이후다. 정부가 염해(鹽害)로 농사를 짓지 못하는 농지에서 태양광발전 시설을 최장 20년간 설치·운용할 수 있도록 허용한 것이다. 법안의 본래 취지와 달리 정상적으로 농사짓고 있던 우량농지가 염해 판정을 받아 태양광 부지로 둔갑하는 사례가 빈번히 발생했다. 태양광 사업자들은 거대 자본을 바탕으로 방대한 농지를 임대하거나 사들였다. 그 과정에서 임차농들은 맥없이 쫓겨났다. 약산도 예외가 아니다. 정씨는 “30년 가까이 같은 땅에서 양질의 쌀을 생산해왔다”면서 “그 세월은 이곳이 염해농지가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고 말했다.

귀농인 임효상(38)씨가 가족들과 함께 수확을 앞둔 자신의 농토에 섰다. 임씨는 “태양광 패널이 농토를 뒤덮는다면 마을을 떠날 계획”이라고 밝혔다.

“태양광이 농토를 뒤덮는 모습을 상상하면 정신이 아득해진다. 그게 현실이 된다면 식구들과 이곳을 떠날 것이다.” 약산면 농민 임효상(38)씨는 15년간 외지생활을 하다가, 3년 전 세 아이를 데리고 부인과 함께 귀농했다. 어린 자녀들에게 농촌의 정서를 전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는 현재 청년창업농에 선발돼 농촌에 정착할 수 있도록 국가지원을 받고 있다. 농지를 임대하고, 농기계를 사고, 농사일이 손에 익을 무렵 지주로부터 연락받았다. “태양광 사업을 할 것이니, 더는 농사를 짓지 말라”는 통보였다. 임씨는 “대규모 태양광발전소가 들어서면 약산면 관산리 농지의 80%가 사라지고, 이는 이 지역 경제활동의 근거지가 없어지는 걸 의미한다”면서 “현재 정부는 기후위기에 대응한다면서 식량안보를 흔들고 지방소멸을 앞당기는 일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국가 정책의 일방성과 모순성에 절망한다”고 토로했다.

농민 이덕한(69)씨가 본인의 마늘밭에서 파종하고 있다. 그의 농지 뒤로는 이미 56만㎡ 규모의 태양광발전소가 새까맣게 들어서 운영 중이다
농민 이덕한(69)씨가 귀농한 아들네 가족과 함께 논두렁에 서서 노을을 바라보고 있다.

“태양광 업자들이 마을에서 벌인 돈 잔치에 의해 이곳 농촌 공동체는 비참할 정도로 황폐해졌다. 농토는 투기판으로 변했고, ‘왜 굳이 힘들게 농사를 짓는가’라는 물음에 시달리게 됐다.” 전남 무안군 운남면 마늘밭에서 만난 농민 이덕한(69)씨는 여러 번 한숨을 내쉬었다. 10년 전 귀농한 아들 두현(40)씨와 함께 농사짓고 있는 그는 “현재의 농촌 태양광 정책은 임대농들을 죽이고, 농촌에 와서 정착해보려는 청년농들의 앞길을 막아서고 있다”고 말했다.

전남 영암군 삼호읍 영산강 인근 간척 농지에 태양광 패널이 바둑판처럼 설치돼 있다.

최병성 초록생명평화연구소장은 “농민들의 귀중한 땀과 세월이 녹아 있는 농토가 태양광 업자들의 사적 이익 추구의 수단이 되어가고 있다”면서 “지금 농촌에서 시행되는 태양광발전 등 신재생에너지 정책은 윤리적이지도 민주적이지도 않다”고 진단했다.


무안·완도=글·사진 하상윤 기자 jonyyun@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