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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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위 1%가 富 35% 차지… 빈부격차 해가 갈수록 심화 [세계는 지금]

‘오징어 게임’ 열풍으로 본 美 양극화

정치학자 ‘녹색 운동복’ 입고 TV뉴스 해설
“오징어게임, 미국인 경제적 어려움 이야기”
10가구 중 4가구 최근 몇 달 심각한 재정난
연간 소득 5만달러 미만 가구 59% 해당
코로나, 저소득층에 타격 美도 예외 아냐

상위 20% 가구 소득, 하위 20% 가구의 15배
상위 1% 소득 점유 19%·하위 50%는 13%
1996년 점유율 역전이후 매년 격차 벌어져
소비자물가·집값 동반 상승… 불평등 부채질
한국은 2019년 상위 1%가 소득 16% 가져가

“미국인들은 그들만의 ‘오징어 게임’에 참가하려 할까요?”

지난 8일 미국 MSNBC방송 ‘더 비트’에 출연한 정치학자 제이슨 존슨 모건주립대 교수는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 속 녹색 운동복을 입고 뉴스 해설을 진행했다. 운동복을 입은 것은 오징어 게임을 향한 ‘오마주’라고 했다.

존슨 교수는 “넷플릭스 역대 최고 시청자 수를 기록한 오징어 게임은 오늘날 대부분의 미국인이 겪는 경제적 어려움에 대해 이야기한다”고 말했다. 이어 “무책임하지 않음에도 삶을 위한 최소한의 돈도 벌지 못하고, 빚을 지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많은 미국인들과 긴밀하게 연결돼 있다“고도 했다.

지난 8일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 속 녹색 운동복을 입고 미국 MSNBC방송 ‘더 비트’에 출연해 뉴스 해설을 진행 정치학자 제이슨 존슨 모건주립대 교수. MSNBC방송 캡처

그는 세계 정치지도자와 억만장자 등 유력 인사들이 조세회피처에 거액을 숨겨놓고 탈세와 불법·편법을 일삼았다는 ‘판도라 페이퍼스’를 언급한 뒤 미국 사회의 양극화, 그리고 조 바이든 행정부의 지지부진한 양극화 해소 정책을 비판했다.

오징어 게임을 두고 쏟아져 나오는 각종 평가 중에서 존슨 교수의 관점은 특별하다. 미국에서 오징어 게임에 대한 보도는 주로 ‘언어 장벽을 뛰어넘은 넷플릭스 최고 히트작’이라는 찬사 위주의 ‘엔터테인먼트’ 분야 기사로 다뤄진다. 워싱턴포스트와 뉴욕타임스 등 주요 일간지도 한국 특파원이 한국의 양극화 현상과 정치 상황 등을 설명하며 오징어 게임을 한국 특유의 콘텐츠로 풀어내는 식이다. 미국과 세계가 오징어 게임에 열광하는 것이 그들이 겪는 양극화와 불평등에 기초한다는 사실은 잘 다뤄지지 않는다. 존슨 교수는 미국에서의 오징어 게임 열풍이 미국의 불평등과 맞닿아 있다고 설명했다.

 

◆美 10가구 중 4가구, 최근 몇 달간 심각한 재정난

22일 미국 공영 라디오 방송 NPR와 로버트 우드 존슨 재단, 하버드 공중보건대학이 공동으로 발표한 ‘델타 변이 확산 과정에서 미국 가구의 경험’이란 제목의 여론조사(전국 성인 남녀 3616명 대상, 8월 2일∼9월 7일 조사)를 보면 전체 가구 중 38%가 최근 몇 달 동안 공과금이나 신용카드 대금 결제 등을 포함해 심각한 재정적 어려움을 겪었다고 답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을 인종별로 살펴보면 라틴계 가구가 57%, 흑인 가구가 56%로 평균을 크게 웃돌았다. 반면 백인 가구는 29%가 재정적 어려움을 겪었다고 답했다.

소득에 따른 양극화는 더욱 심했다. 연간 소득이 5만달러(5900만원) 미만인 가구의 경우 59%가 최근 몇 개월 동안 심각한 재정 문제가 있었다고 응답한 반면 5만달러 이상인 가구는 18%만이 재정 문제를 경험했다고 답했다. 코로나19 타격이 저소득층에 집중되는 것은 미국도 예외가 아니다.

전체 가구의 27%는 최근 몇 달간 월세를 내는 데 심각한 어려움을 겪었다고 응답했고, 19%는 코로나19 기간에 그동안 저축했던 돈을 모두 썼다고 응답했다.

로버트 블렌던 하버드 공중보건대학 교수는 “그들은 여전히 코로나19 한가운데 있고, 재정적 문제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말했다. 저소득층을 중심으로 재정적 어려움은 더 심각해지고, 불평등도 심화할 것이라는 의미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오징어 게임' 스틸컷. 넷플릭스 제공

◆상위 1% 소득 점유율 18.8%, 전체 부의 35% 차지

미국의 양극화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미 인구조사국에 따르면 소득 하위 20%에 해당하는 1분위 가구의 지난해 소득은 전체 가구 소득의 3.4%에 불과하다. 소득 상위 20%에 해당하는 5분위 가구는 미국 전체 소득의 절반이 넘는 50.8%를 차지했다. 소득 상위 20% 가구의 소득이 소득 하위 20% 가구보다 15배 가까이 많다는 의미다.

‘21세기 자본’의 저자 토마 피케티를 포함한 세계 경제학자 100여명이 70여개국의 소득·자산 자료를 모은 세계불평등데이터베이스(WID)를 보면 미국의 양극화는 더욱 분명하다.

 

2019년을 기준으로 미국 상위 1%의 전체 소득 점유율은 18.8%에 달한다. 하위 50%의 소득 점유율 13.3%를 크게 웃돈다. 1990년만 해도 하위 50%의 소득이 전체 소득의 16.3%, 상위 1% 소득이 14.3%이던 것이 1996년 상위 1%가 15.2%, 하위 50%가 15.0%로 소득 점유율이 역전된 이후 해가 갈수록 하위 50% 소득은 줄고, 상위 1% 소득은 늘어나며 격차가 벌어지고 있다. 

부(富)의 집중도는 더 극적이다. WID 집계를 보면 상위 1%가 미국의 전체 부의 34.9%를 차지한다. 파이 100조각 중에 35조각을 상위 1%가 차지하고 있다는 의미다. 반면 하위 50%는 전체 부 점유율이 1.5%에 불과했다. 오징어 게임에 등장하는 VIP들과 오징어 게임 참가자들이 겹쳐진다.

같은 통계에서 2019년 한국의 상위 1% 전체 소득 점유율은 16.0%, 하위 50%의 소득 점유율은 14.7%로 매우 큰 격차를 보였다. 한국의 부 점유율의 경우 마지막으로 업데이트된 2013년을 기준으로 상위 1%가 전체 부의 25%를 차지하고, 하위 50%는 1.8%를 차지한 것으로 집계됐다.

워싱턴포스트가 지난해 영화 ‘기생충’에 대해 설명하면서 “한국의 불평등을 악몽처럼 그린다. 미국에서의 현실은 훨씬 더 나쁘다”고 평가하면서 WID 통계를 인용하기도 했다.

◆소비자물가, 집값 모두 고공행진… 저소득층 타격

미국의 불평등은 코로나19를 거치면서 심화하고 있다. 특히 미국의 경제 상황이 저소득층을 더욱 옥죄는 모습이다.

미 노동부에 따르면 지난달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전년 동월 대비 5.4%를 기록해 13년 만에 최대 상승률을 기록했다. 올해 초만 해도 1∼2%대를 기록하던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지난 4월 4.2%를 기록하더니 5월 5.0%, 6월 5.4%, 7월 5.4%, 8월 5.3% 등 5개월 연속 5%대 상승률을 기록 중이다.

 

지난달 소비자물가 상승을 품목별로 보면 에너지 가격이 전년 동월 대비 24.8% 상승했다. 차 없이 살 수 없다는 미국에서 휘발유 가격이 전년 동월 대비 42.1%나 상승하며 물가를 끌어올렸다. 음식료 가격도 1년 전보다 4.6% 올랐다.

17일 월스트리트저널이 재계, 학계, 금융업계의 전문가 67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결과 올해 12월 물가상승률 평균치는 5.25%로 집계됐다. 물류대란, 원자재 부족 사태 등까지 겹치면서 당분간은 물가 고공행진이 이어진다는 전망이다.

집값도 코로나19 상황에서 사상 최고 기록을 갈아치웠다. 미 부동산중개인협회(NAR)에 따르면 지난 8월에 팔린 기존 주택 중위가격은 35만6700달러(4억2000여만원)로 전년 동월 대비 14.9% 상승했다. 기존 주택 거래는 미 전체 주택시장 거래량의 90%를 차지한다.

NAR에 따르면 올해 1월 30만3600달러로 시작한 기존 주택 중위가격은 지난 6월 36만2800달러로 역대 최대를 기록했다. 증가율은 전년 동월 대비 23.2%를 기록했다.

집값 상승은 임대료 상승으로 이어진다. 지난 13일 연방준비제도(연준·Fed)는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 의사록에서 “집값 상승이 임대료에 대한 상승 압력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에 주의 깊은 관찰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바이든 행정부의 ‘임차인 퇴거 유예 조치’로 간신히 주거를 유지하고 있는 임차인들이 벼랑 끝으로 내몰리는 상황이다.

오징어 게임을 만든 황동혁 감독은 미국의 정치·경제 상황이 작품에 영향을 미쳤다고 밝히기도 했다. 황 감독은 지난 10일 미국 영화 전문매체 인디와이어와의 인터뷰에서 리먼브러더스 사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당선, 전 세계적 가상화폐 열풍, 페이스북, 구글과 같은 정보기술(IT) 대기업 부상 등이 작품에 영향을 미쳤다고 설명했다. 황 감독은 “트럼프가 오징어 게임의 VIP 중 한 명을 닮았다고 생각한다. 마치 나라가 아니라 게임쇼를 운영하는 것 같아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 했다”며 “이 모든 문제들이 있고 나서 오징어 게임이 세계로 나갈 때가 됐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워싱턴=박영준 특파원 yjp@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