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메뉴 보기 검색

‘생수병 독극물’ 클릭만으로 구매 가능… 관리 허술 지적

시약 온라인몰, 본인 인증만 요구
“시험·연구용 준수해야” 고지뿐
개인에 구매목적 확인할 길 없어
고농도 유독물질 ‘세탁용’ 판매도

환경부 “구매 원천금지 불가능
모니터링 통해 규정 위반 단속”

피의자 부검서도 ‘생수 독극물’
사진=연합뉴스

“오늘 저희 쪽에 아지드화나트륨 주문해 주셨는데요. 선택하신 브랜드 재고가 없어서, 순도가 조금 높은 제품으로 변경해서 보내드려도 될까요?”

 

26일 오후 한 연구용 시약 전문 쇼핑몰의 관계자가 기자에게 전화해 이렇게 물었다. 기자는 한 시간여 전 이 쇼핑몰에서 아지드화나트륨 25g을 택배 주문했다. 기자가 다른 브랜드 제품 배송에 동의하자, 쇼핑몰 관계자는 “주문하신 제품보다 조금 고가인데 차액은 저희가 부담하겠다”고 안내했다. 아지드화나트륨은 최근 서울 서초구의 한 회사에서 발생한 이른바 ‘생수병 음독 사건’ 용의자가 범행에 쓴 걸로 추정되는 독극물이다.

 

생수병 사건 용의자가 사전에 인터넷으로 아지드화나트륨 등 독극물을 구매한 사실이 드러났는데 일반인도 본인 인증만 하면 어렵지 않게 해당 물질을 온라인 주문할 수 있었다.

 

이날 기자는 시약 전문 쇼핑몰에 회원가입을 한 뒤 휴대전화로 본인 인증을 하는 절차만으로 아지드화나트륨을 손쉽게 구매할 수 있었다. 화학물질관리법은 유해화학물질 판매업체가 온라인 거래 시 구매자에 대한 실명·연령 확인 및 본인 인증을 하도록 정하고 있다.

 

시약용 유해화학물질 판매업체가 구매자에게 물품 용도 제한에 대해 고지할 의무도 부과하고 있지만, 이는 말 그대로 ‘고지’에 그칠 뿐이다. 기자가 구매한 업체는 공지사항을 통해 ‘시험용, 연구용, 검사용 시약은 해당 용도로만 사용해야 한다’, ‘취급 시 유해화학물질 취급 기준을 준수해야 한다’고 알리고 있었다. 다만 기자에게 구매 목적을 따로 확인하지는 않았다.

26일 기자가 한 연구용 시약 전문 쇼핑몰에서 구매한 아지드화나트륨 주문내역. 온라인 캡처

판매업체 입장에서 구매 목적을 일일이 확인하는 게 현실적으로 어렵기 때문에 아예 개인에게는 판매하지 않는 업체도 많다. 환경부 관계자는 “법적으로 개인에게 시약을 판매할 수 있지만, 업체가 그 용도가 적합한지 감시하는 게 쉽지 않은 사정 때문에 학교나 시약을 쓸 법한 법인들에게만 판매하겠다고 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생수병 사건 피의자 강모(사망)씨의 경우 본인 회사와 계약관계에 있는 다른 회사의 사업자등록증을 도용해 아지드화나트륨 등 유독물질을 구매했다. 경찰은 강씨가 사건 당일인 지난 18일 오후 5시37분쯤 퇴근한 뒤 곧장 관악구 자택으로 향하지 않고 밤늦게 귀가한 사실 확인하고 당시 행적을 추적 중이다. 강씨는 사건 다음 날인 19일 오전 5시쯤 자택에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경찰은 이날 “국립과학수사연구원 부검 결과 강씨 몸에서 아지드화나트륨이 검출된 사실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생수병 물을 마시고 쓰러졌다가 숨진 피해자에게서도 아지드화나트륨이 검출됐다.


강씨 자택에서 나온 다른 물질인 수산화나트륨과 메탄올의 경우 아지드화나트륨보다 구매가 더 쉬운 편이다. 두 물질은 함량에 따라 유독성 유무가 결정되기에 그 함량 기준 미만일 경우 일반인 대상 판매가 제한되지 않는다. 수산화나트륨은 5% 이상, 메탄올은 85% 이상 함유될 경우 유독물질로 취급된다.

직원 2명이 지난 18일 생수병에 든 물을 마시고 쓰러지는 사건이 발생한 서울 서초구 양재동의 한 사무실이 21일 조명이 모두 꺼진 채 텅 비어 있다. 뉴시스

온라인에서는 고농도 제품이 세탁용으로 판매되고 있었다. 한 유명 세탁전문 유튜버는 기름 얼룩 제거용으로 순도 99% 수산화나트륨 제품을 소개하고 구매 가능한 인터넷 주소까지 안내했다. 환경부 관계자는 “시약 용도가 아닌 세탁 용도로 수산화나트륨을 판매하는 사이트가 있다면 그건 규정 위반 소지가 있다”며 “모니터링을 통해 문제 사이트가 확인되면 포털에 삭제 요청하고, 필요한 경우 사실 확인해서 행정처분을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일각에서는 개인의 유독물질 구매를 원천 금지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도 나오지만 정부나 대다수 전문가는 비현실적이라는 입장이다. 환경부 관계자는 “개인 발명가가 시약을 구매하는 경우도 많다”며 “오남용이 확인되면 어떤 처분을 할 수 있겠지만, 이를 제도적 차원에서 막는 건 어렵다”고 말했다. 모 대학 화학과 교수도 “독극물이나 의약품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기준 이상으로 먹으면 부작용이 생기는 원리”라며 “칼이 범죄 도구로 쓰인다고 칼 판매를 금지할 건 아니지 않냐”고 지적했다.


김승환·유지혜 기자 hwan@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