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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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 원폭위령비, 悲願실현 기쁨과 만시지탄 교차 속 희생자 넋 기린다

日 나가사키 원폭 한인위령비 제막 현장

한·일관계자 200명 제막식 참석
피해자 95세 할머니 “감개무량”

사망자 최대 2만여명으로 추산
강창일 대사 “혹자 정치비화 우려
중국비도 세워져 있어 문제없어”
강창일 주일 한국대사, 강성춘 재일대한민국민단 나가사키 본부 단장, 무카이야마 무네코 나가사키 시의회 공명당 대표 등이 6일 일본 나가사키시 평화공원에서 한국인 원폭희생자위령비의 흰막을 걷어내며 손뼉을 치고 있다. 나가사키=김청중 특파원

“나가사키(長崎) 한국인원폭희생자위령비가 내일(6일) 세워집니다.” “네?”

 

“위령비가 세워지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거 만들려고 하는데 못 만들고 있잖아요. 너무 늦어지고 있어요. (시 당국의) 허가도 나오지 않고 돈도 걷어야 해서요.”

 

“허가받았습니다.” “허가받았다고요? (그런데) 돈이 부족하니….”

 

“돈은 이미 충분히 모여있었고 허가가 나오지 않았던 것인데, 허가가 나와서 내일 제막식을 합니다.” “내일?”

 

나가사키 원폭 경험자인 권순금(95) 할머니가 한국인원폭희생자위령비 제막 사실을 처음 듣는다는 투로 도무지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김상진 재일대한민국민단 나가사키현(縣) 지방본부 사무국장이 일주일 전 방문해 위령비 건립 사실을 설명한 것은 물론 김 국장 얼굴도 까맣게 잊어버렸다. 100년 가까운 세월을 보내며 희미해지는 기억 안에서 때때로 길을 잃는다.

할머니는 민단 부인회 나가사키본부장 회장으로 지문날인반대운동, 지방참정권운동을 했다. 1983년 68세 나이로 “어머니 갑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떠난 남편도 나가사키의 재일조선인연맹 위원장, 민단 단장을 역임한 인물로 피폭자였다. 나가사키에 생존하는 거의 유일한 한국인 원폭 경험자로서 위령비 건립에 가장 감격할 사람 중 한 분이다. 40분 넘는 설명과 대화 속에서 점멸하는 기억의 형광등에 다시 불이 들어왔다. 할머니는 “뭐라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아주 기쁠 뿐입니다. 감개무량합니다”라고 소감을 말했다.

 

1945년 8월9일 나가사키 원폭투하 76년, 건립 추진 27년 만에 비원(悲願) 실현의 감격과 만시지탄의 아쉬움이 교차하는 가운데 6일 한국인원폭희생자위령비의 흰 막이 걷어졌다.

평화대사로 참석한 일본 고교생이 6일 나가사키 한국인원폭희생자위령비 제막식에서 헌화하고 있다. 나가사키=김청중 특파원

나가사키시 평화공원 인근 원폭자료관 앞에서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가운데 열린 위령비 제막식에는 강창일 주일 한국대사, 강성춘 민단 나가사키 본부 단장(건립추진위원장), 무카이야마 무네코(向山宗子) 시의회 공명당 대표 등 한·일 관계자 약 200명이 참석했다.

 

나가사키현 내 일본인 고등학생 7명(남1·여6)으로 이뤄진 평화대사들이 손수 접은 평화의 상징 종이학 1000마리를 위령비에 바쳤다. 원폭 투하시간인 오전 11시2분부터 1분간 희생자를 기리는 묵도가 진행되기도 했다.

 

강창일 대사는 제막식 후 원폭자료관에서 열린 위령제 추도사를 통해 “혹자는 한국인을 위한 위령비가 자칫 한·일 간 정치적 문제로 비화하지 않을까 우려한다”며 “그런데 나가사키 공원에는 일본 현마다 위령탑이 세워져 있고 중국(의 비)도 이미 세워져 있다. 가장 가까운, 그리고 같은 가치와 이념을 가지고 있는 한국의 위령비가 이제까지 없었던 것에 대해 일본이 다시 생각해 봐야 한다”고 일갈했다.

일본 나가사키 원폭 경험자인 권순금(95) 할머니가 한국인원폭희생자위령비 제막을 하루 앞둔 6일 원폭 피해자였던 남편 조연식 전 민단 나가사키본부 단장의 사진을 가리키며 원폭투하 당시의 상황과 소감을 이야기하고 있다. 나가사키=김청중 특파원
한국인원폭희생자위령비. 나가사키=김청중 특파원  

1945년 8월6일 원폭투하 지역인 히로시마에는 1970년 한국인 위령비가 건립됐다. 나가사키에서는 1994년 민단 나가사키 본부가 위령비 건립을 위한 장소 제공을 요청하고, 2011년 한국원폭피해자협회가 시에 진정서를 내면서 본격적으로 추진됐다.

 

1991년 나가사키 재일조선인의 인권을 지키는 회가 작성한 ‘원폭과 조선인’에 따르면 원폭투하로 인한 나가사키 사망자 약 7만4000명 중 한반도 출신은 최대 2만2198명인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500여 차례 방한하며 한국인 원폭 피해자를 도와온 히라노 노부토(平野伸人) 평화활동지원센터 소장은 위령비 건립에 대해 “오늘은 미래를 위해 과거를 회고하는 귀중한 하루가 되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위령비는 3m 높이로 거북이 등에 올려있다. 당초 3.5m 높이로 하려고 했으나 시 요구로 0.5m를 낮췄다.

평화대사로 참석한 일본 고교생들이 6일 나가사키 한국인원폭희생자위령비 제막식에서 1945년 8월9일 원폭이 투하됐던 시간에 맞춰 11시2분부터 1분간 묵도하고 있다. 나가사키=김청중 특파원

위령비가 웅변하는 나가사키 한국인 피폭자의 역사는 일제 강점과 강제동원이라는 고난의 민족사와 궤를 같이한다. 바로 인근에 그 유명한 군함도(하시마탄광)도 있다. 원폭자료관은 전시물에서 “나가사키에서 많은 외국인이 피폭됐다. 피폭자 수가 가장 많은 것은 조선인이었다. 조선반도에서 강제연행돼 군수공장 등에서 노동자로 동원된 사람이 많았다”고 적시하고 있다.

 

과거엔 당연시됐던 강제동원은 아베 신조(安倍晋三) 정권의 우경화 노선 여파로 일본 사회가 보수화하면서 금기어가 되어가는 안타까운 현실이다. 이번에도 공유지를 제공한 시 당국이 위령비 안내문에 강제노동이라는 단어를 써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고수함에 따라 결국 ‘본인의 의사에 반(反)하여 노동자, 군인 및 군무원으로 징용, 동원되는 사례가 증가하였고’라는 표현으로 절충됐다.

한반도에서 강제동원된 노동자들이 노역했던 군함도(하시마탄광). 나가사키=김청중 특파원  

행사 종료 후 극우 성향의 산케이신문 기자는 강창일 대사에게 ‘본인 의사에 반하여’라는 표현의 의미를 집요하게 물었다. 강 대사는 이에 대해 “강제연행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고 말했다. 산케이신문은 7일 보도에서 안내문 표현과 관련해 “정치적으로 이용될 수 있는 우려가 남아있다”고 계속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강성춘 민단 나가사키본부 단장은 “위령비의 형상과 비문 내용 등에서 견해차로 당초 진전을 보지 못했지만 서로 건립 의의를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끈질기게 협의해 건립하게 됐다”며 “위령비가 한·일의 진정한 우호 증진과 한국인 피폭의 역사를 후대에 알리는 계기가 되기 바란다”고 말했다.


나가사키=김청중 특파원 ck@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