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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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 전 태평양전쟁, 美·中 대결로 재현되나 [심층기획]

日 진주만 공습… 당시 석유가 원인
지금은 반도체·대만 놓고 G2 갈등
美, 쿼드·오커스 동맹으로 中포위망
中도 러 손잡고 인·태지역 공동전선

美, 쿼드로 반도체 첨단 기술서 中 배제
오커스 통해선 濠 핵잠수함 건조 지원
中, 막대한 경제력 바탕… 군사력 키워 맞서
러시아와도 손잡고 공동대응 의지 천명

1941년 12월 7일 일본의 미국 하와이 진주만 공습으로 태평양전쟁이 발발한 지 80년이 됐다. 당시 제국주의 일본의 팽창을 막고자 일본에 대한 석유 수출을 금지한 미국의 조치가 전쟁의 도화선으로 작용했다. 약 4년에 걸친 전쟁 끝에 일본은 결국 무릎을 꿇고 이후 미국이 주도하는 인도태평양 질서에 편입됐다.

 

80년이 흐른 지금 이 지역엔 또다시 전운이 감돌고 있다. 태평양전쟁이 하와이에서 시작했다면 이번엔 대만을 둘러싼 정세가 심상치 않다. 미국 중심의 인도태평양 질서를 뒤흔들려는 중국은 공공연히 대만 침공을 입에 올린다. 미국은 “대만해협의 현상을 반드시 유지하겠다”는 입장이나, 지금의 중국은 과거 일본과는 비교가 안 될 만큼 강하다는 점에서 미 행정부의 고심이 깊다.

 

진주만 공습은 대담한 작전이었다. 당시만 해도 항공모함에서 이륙한 전투기로 적의 주요 거점을 타격한다는 발상 자체가 하기 힘든 것이었다. 대다수 미국인은 일본과 미국의 거리를 들어 ‘일본군이 미국 땅을 공격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여겼다. 일본의 도발 징후가 곳곳에서 포착됐음에도 공습 당일 미국이 완전히 허를 찔린 이유다.

일본이 작전에 동원한 항모 4척에서 출격한 전투기들은 하와이의 미 해군 태평양함대 사령부를 마음대로 휘젓고 다녔다. 항구에 정박해 있던 군함 16척과 지상 비행장에서 대기 중인 군용기 177대가 파괴됐다. 그나마 미 해군이 보유한 항모 3척이 바다에 나가 있어 피해를 면한 것이 미국엔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기습 이튿날 프랭클린 루스벨트 당시 미 대통령은 의회 연설에서 “어제인 1941년 12월 7일, 이날은 ‘치욕(infamy)의 날’로 기억될 것”이라고 말했다.

 

절치부심한 미 해군은 태평양함대사령관 허즈번드 킴멜 제독을 강등시키고 대신 체스터 니미츠 제독을 그 자리에 앉혔다.

 

6개월여가 지난 1942년 6월 미드웨이 해전에서 미 해군은 일본군 항모 4척을 격침시키는 놀라운 성공으로 진주만의 치욕을 되갚았다. 이로써 태평양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한 미국이 승기를 잡았다.

◆ABCD 포위망 연상시키는 쿼드·오커스

태평양전쟁 발발 직전 일본 국내에선 이른바 ‘ABCD 포위망’을 비난하는 움직임이 확산했다. 미국(America), 영국(Britain), 중국(China·현 대만), 네덜란드(Dutch) 네 나라의 머리글자를 따 만든 이 용어는 당시 국제사회에서 ‘왕따’가 된 일본의 처지를 잘 보여준다. 중국과는 1937년부터 전쟁 중이고 미국은 중국에 동정적이었다. 영국은 식민지인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홍콩과 자치령 호주를 일본이 노린다고 의심했다. 네덜란드 역시 식민지 인도네시아에 일본군이 상륙할까봐 긴장했다.

유럽의 제2차 세계대전에서 프랑스가 독일에 무너지자 일본은 재빨리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점령했다. 이에 격분한 미국과 영국, 네덜란드는 자국 내 일본 자산 동결령 등 고강도 경제제재를 가했다. 급기야 1941년 9월에는 일본에 대한 석유 수출을 금지했다. 당시 일본이 수입하는 석유의 80%가 미국, 10%는 네덜란드령 인도네시아에서 왔다. 석유뿐 아니라 일본이 인도네시아에서 수입하던 고무, 주석 등도 당장 공급이 끊길 판이었다. 일본으로선 평화노선으로 전환하거나 미국을 공격하는 것 말고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미국의 핵추진 항공모함 니미츠호. 세계일보 자료사진

오늘날 미국이 중국을 견제하고자 구축한 미국·호주·일본·인도 4국 협의체 ‘쿼드’와 미국·영국·호주 3국 동맹 ‘오커스’를 보면 자연스럽게 80년 전의 ABCD 포위망을 떠올리게 된다. 당시엔 석유가 가장 중요했지만 요즘은 반도체와 각종 첨단장비가 그 자리를 차지한다. 지난 9월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쿼드 4국 정상회의는 ‘반도체를 포함한 핵심 기술 및 물자 공급망’의 구축이 가장 중요한 의제였다. 핵심 기술과 물자 공급망에서 중국을 따돌리려는 의도가 읽힌다.

오커스는 미·영의 핵추진 잠수함 건조기술을 호주에 전수하는 것이 골자다. 앞으로 호주가 운영할 핵잠수함이 누굴 겨냥할지는 명확하다. 미 백악관에서 인도태평양 지역 정책을 총괄해 ‘아시아 차르’로 불리는 커트 캠벨 국가안보회의(NSC) 인도태평양 조정관은 최근 쿼드와 오커스의 중요성을 거듭 강조하며 “미국은 쇠퇴하지도, 인도태평양을 떠나지도 않을 것”이라고 다짐했다.

중국이 2017년 인민해방군 창설 90주년 기념식에서 공개한 핵탄두 탑재용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세계일보 자료사진

◆그때의 일본보다 훨씬 강력해진 중국

든든한 동맹국들이 곁에 있지만 그래도 미국은 불안하다. 지금의 중국은 80년 전에 상대했던 일본에 비해 너무나 강력한 적수이기 때문이다. 태평양전쟁 초반 미국은 필리핀을 일본에 빼앗기는 등 고전을 면치 못했지만, 이는 미국이 제국주의 일본보다는 나치 독일을 타도하는 데 정책 우선순위를 뒀기 때문이다.

‘12전환점으로 읽는 제2차 세계대전’의 저자인 영국 역사가 필립 벨은 “태평양과 동아시아에서는 일본이 혼자서 미국과 영국, 호주 연합군을 상대로 전쟁을 벌였다”며 “전시 생산에서 이것은 기껏해야 미디엄급 선수(일본)와 헤비급 선수(미국)의 싸움”이라고 했다. 책에 따르면 미드웨이 해전에서의 패배로 항공모함 4척을 잃은 일본은 1943년 3척, 1944년 4척의 항모를 새로 건조했다. 같은 기간 미국은 무려 90척의 항모를 진수시켰다.

중국은 다르다. 국제통화기금(IMF) 자료에 의하면 지난해 중국의 국내총생산(GDP)은 약 14조8600억달러로 미국 GDP 20조8100억달러의 70%를 넘어섰다. 이미 독일·프랑스·이탈리아 등 유럽연합(EU) 전체 회원국의 GDP를 다 합친 것보다 중국이 더 많다. 더욱이 중국은 이 막대한 경제력의 상당 부분을 군사력 강화에 쏟아붓고 있다.

미 국방부는 최근 보고서에서 현재 320개 정도로 추정되는 중국의 핵탄두가 2030년까지 1000개 이상으로 늘어날 것이란 전망을 내놓았다. 미국이 약 3800개의 핵탄두를 갖고 있는 점을 감안하면 핵무력 측면에서 미·중 격차가 급격히 좁혀지는 셈이다. 그뿐 아니다. 음속보다 5배 이상 빨라 일단 발사되면 방어가 거의 불가능해 ‘게임 체인저’로 불리는 극초음속 미사일의 경우 중국이 미국보다 오히려 앞서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존 하이튼 전 미군 합참차장(공군 대장)은 “최근 5년간 미국의 극초음속 무기 시험은 9회에 그친 반면 중국은 극초음속 미사일을 수백회 발사했다”고 말해 이 분야에서 미국이 뒤처져 있음을 솔직히 인정했다.

◆인도태평양에 쏠리는 세계 각국 시선

태평양전쟁 개전 당시만 해도 인도태평양에서 가장 큰 세력권을 형성한 나라는 영국이었다. 인도, 미얀마, 홍콩, 말레이시아, 싱가포르를 지배하고 호주와 뉴질랜드까지 자치령으로 거느린 영국은 지역의 패권자로 불릴 만했다. 그러나 유럽에서 2차대전이 터지며 영국은 이들을 안전하게 지킬 수 없게 됐다. 태평양전쟁 발발 후 일본은 홍콩, 말레이시아, 싱가포르를 차지하고 인도와 호주도 위협했다. 태평양전쟁이 끝나고 영국이 잠시 복귀하긴 했으나 옛 식민지들은 대부분 독립했고, 영국은 더는 태평양의 주요 행위자가 아니었다.

그랬던 영국이 80년 만에 인도태평양에 돌아왔다. 브렉시트(영국의 EU 탈퇴) 이후 인도태평양으로 눈을 돌린 영국은 미국과 연대해 이 지역에서 과거와 같은 주도적 역할을 맡으려 한다. 중국 견제를 목표로 미국·호주와 오커스를 결성한 것이 대표적이다. 영국은 쿼드에의 참여도 희망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최근에는 포괄적·점진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 가입 의사까지 밝혔다.

영국뿐 아니다. EU를 주도하는 프랑스와 독일도 인도태평양에 주목하고 나섰다. 특히 오커스 결성에서 따돌림을 당한 프랑스가 적극적이다. 필립 르포르 주한 프랑스대사는 얼마 전 기자간담회에서 “프랑스는 인도태평양에 속해 있고, 이 지역에서 프랑스만의 비전을 갖고 있다”며 앞으로 한국 등과 더욱 적극적으로 협력할 의사를 내비쳤다. 독일 역시 해군 호위함 바이에른호를 내년 2월까지 인도태평양에 머물게 하며 한국 등 이 지역 국가들을 차례로 방문토록 했다. 지난 2일 바이에른호가 부산에 입항하자 주한 독일대사관은 “이번 항해는 세계의 중심축으로 부상하는 인도태평양에서 독일이 활동을 강화하겠다는 신호”라고 밝혔다.

반대편에선 러시아가 중국과의 군사협력 확대를 내걸고 인도태평양에 깊숙이 발을 들여놓기 시작했다. 특히 지난 10월 14∼18일 실시된 양국 해군의 첫 연합 해상전략 순항훈련은 두 나라 군함들이 함께 일본 혼슈와 홋카이도 사이 쓰가루해협을 통과해 동해에서 태평양으로 진출하면서 한국, 일본 등 주변국들을 자극했다. 러시아 군사전문가 빅토르 리토프킨은 “국제정세가 악화할 경우 러시아와 중국이 공동대응에 나서겠다는 의지를 보여준 것”이라고 평가했다.


김태훈 기자 af103@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