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시장에서 오랫동안 외면받았던 프랑스 라팔 전투기가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너무 비싸고 정교하며, 지나치게 프랑스적인’ 전투기로 평가받았던 라팔은 최근 수년간 제3세계 국가를 중심으로 잇따라 수출 계약을 맺고 있다. 미국 F-35A, 유럽 타이푼 전투기의 견제를 뚫고 얻은 성과라는 점에서 많은 주목을 받는다.
라팔의 뒤늦은 수출 드라이브는 2020년대 후반 이후 본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낼 KF-21의 해외 진출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스텔스기 도입이 어려운 국가를 중심으로 한 ‘틈새시장’을 라팔이 먼저 장악한다면, KF-21의 수출은 한층 더 어려워질 전망이다.
◆아랍에미리트와 대규모 계약…중동서 ‘존재감’
라팔을 가장 많이 구매한 ‘큰손’은 중동 국가들이다. 아랍에미리트(UAE)는 3일 라팔 80대를 구매하기로 프랑스와 계약했다. 라팔이 실전배치된 이후 최대 규모의 수출 계약이다.
이날 UAE를 방문한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UAE의 실세인 셰이크 모하메드 빈 자예드 왕세자와 함께 닷소의 라팔 80대와 MBDA가 공급하는 항공무장, 에어버스의 카라칼 헬기 12대를 포함한 170억 유로(22조 7500억 원) 규모의 무기 구매 계약 서명식에 참석했다.
라팔 80대 도입에 140억 유로, 미카 NG 공대공미사일과 스칼프 장거리 공대지미사일의 수출형인 블랙 샤힌 등 항공무장이 20억 유로, 카라칼 헬기 12대 구매에 10억 유로가 투입된다.
현지 언론들은 계약 체결을 앞두고 UAE가 라팔 60대를 구매할 것으로 전망했으나, 실제 계약 규모는 더 커졌다.
양측이 계약한 기종은 최신형 F4다. 다기능위상배열(AESA) 레이더 등을 장착해 정밀타격능력이 크게 높아진 F3-R 기종을 기반으로 네트워크 능력과 레이더 탐지 회피 기능을 강화한 것이다. 2024년 개발 완료 후 2027년부터 2031년까지 UAE에 인도될 예정이다.
UAE와 수출 계약을 맺으면서 중동에서 라팔의 입지는 한층 공고해졌다는 평가다. 카타르는 라팔 36대를 도입했으며, 라팔의 첫 해외 고객이었던 이집트도 2015년 24대에 이어 올해 30대를 추가 구매했다.
인도(36대), 그리스(18대), 크로아티아(12대)까지 합치면, 라팔은 불과 6년 만에 236대의 해외 판매를 기록한 셈이다. 인도네시아 등에서도 추가 수주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어 라팔의 수출은 당분간 계속될 전망이다.
이같은 성과는 미국 F-35A를 구매하는 국가가 늘어나는 상황에서 주목을 받고 있다. 스위스와 벨기에는 프랑스의 적극적인 요청에도 F-35A 도입을 결정했다. 강력한 스텔스 성능과 네트워크 능력을 갖춘 F-35A의 도입은 군사적 측면에서 미국을 지지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하지만 미국을 지지하는 모든 국가가 F-35A를 구매하지는 못한다. 친미 국가 중에서도 신뢰할 수 있으며, 중요도가 높은 나라들만 손에 넣을 수 있다.
◆라팔의 공격적 진출…KF-21 해외 진출 서둘러야
라팔 제작사인 닷소와 프랑스 정부는 이같은 빈틈을 파고드는 모양새다. 정치, 경제적 이유로 F-35A를 도입하지 못하는 친서방 또는 비동맹국가 입장에서 라팔은 매력적인 대안이다.
라팔을 도입하면 적 레이더에 탐지될 확률을 대폭 낮추는 스텔스 성능을 확보하지 못하는 대신 강력한 공격력을 확보, 전략적 억제능력을 얻을 수 있다.
함재기로도 개발돼 프랑스 해군에서도 쓰이는 라팔은 공대함 능력이 막강하고, 500㎞ 떨어진 지상 표적을 정밀타격하는 스칼프 공대지미사일과 미티어·미카 NG 공대공미사일 등을 장착하고 있다.
라팔의 이같은 특성은 KF-21과 매우 비슷하다. KF-21은 F-35A보다 스텔스 성능은 낮지만, 미티어와 장거리 공대지미사일 등으로 전략적 수준의 타격력을 갖출 예정이다.
두 기체의 특성이 유사한 만큼 수출 잠재 시장도 비슷할 수밖에 없다. KF-21 공동개발국인 인도네시아가 라팔 도입을 검토한다는 소식이 계속 흘러나오는 것이 대표적 사례다.
라팔은 리비아 내전 등에서 검증된 성능과 20여 년 동안 쌓인 운영 노하우를 토대로 제3세계 국가 등에 적극 진출하고 있다.
한국도 공군이 T-50과 KT-1을 일정 기간 사용한 이후부터 인도네시아, 터키, 페루 등에 수출됐다는 점에서 성능 검증과 운영 노하우 축적은 해외 판매에 핵심 요소라는 평가다.
라팔 도입의 걸림돌이었던 과도한 가격 문제도 어느 정도 해소될 가능성이 있다. UAE와의 계약으로 라팔의 해외 판매 규모는 236대로 늘어났다. 프랑스군이 도입한 192대까지 합치면 전체 생산량은 428대에 달한다. 전투기 생산 손익분기점(300대)을 확실히 넘어섰다. 향후 대당 가격을 낮출 여지가 그만큼 넓어진 셈이다.
검증된 성능과 방대한 운영 노하우, 가격 인하까지 더해지면 2020년대 라팔의 추가 수출 가능성도 높아진다.
라팔 수출 확대는 KF-21의 잠재 시장을 선점하는 결과로 이어진다. 라팔이 해외 시장을 장악하기 전에 어떤 형태로든 대응 전략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 나오는 대목이다.
하지만 KF-21이 라팔과 동일한 수출 전략을 쓰는 것은 쉽지 않다. 기존 계획대로라면 완전한 다목적 전투능력을 갖춘 KF-21은 2020년대 후반부터 2030년대 초에 등장한다. 성능 검증과 운영 노하우 확보에 소요되는 시간까지 더해지면 실질적인 수출 시기는 2030년대 중반이 될 가능성도 있다.
이때는 라팔, F-35A, SU-75와 더불어 영국 템페스트, 프랑스 독일 스페인의 FCAS를 비롯한 6세대 전투기가 등장한다. ‘레드오션’을 방불케 할 정도로 경쟁이 치열해지는 상황에서 비(非)스텔스기 시장은 라팔, 스텔스기 시장은 F-35A을 중심으로 재편될 가능성이 있다.
KF-21이 라팔보다 20년 후에 등장한 기종이지만, 잠재 시장이 될 국가들이 이미 다른 기종을 도입했다면 KF-21의 수출대상국은 그만큼 줄어든다. 인도네시아 도입 물량까지 합쳐도 손익분기점을 넘기기 어려운 상황에서 해외 판매를 통해 돌파구를 열어야 하나, 기존 개발 계획을 유지하면 이마저도 쉽지 않다.
일각에서는 KF-21 관련 계획을 가속화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장거리 공대지미사일 등 항공무장 장착 및 도입 계약을 서두르는 한편, 적극적인 해외 마케팅을 통해 수주 활동 경험부터 빨리 축적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KF-21 관련 업체들이 힘을 합치고, 이를 정부가 지원할 필요가 있다. 프랑스는 라팔 체계통합을 담당한 닷소, 전자장비 개발을 맡은 탈레스, 엔진 제작사인 사프랑이 힘을 합쳐 ‘라팔 인터내셔널’을 구성, 수출 작업을 진행해왔다. 프랑스 정부는 외교적, 재정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방산업계 관계자는 “2002년 차기전투기(F-X) 사업 당시 프랑스 닷소는 라팔 시제기 4대만으로 한국 시장에 도전했다. 그렇게 10여 년을 활동한 경험이 오늘날의 역주행을 낳았다”며 “시제기가 출고된 KF-21도 지금부터 관련 팀 구성 등 해외 판매에 나서서 경험을 쌓아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