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능 끝났으니 친구들이 술 마시자는 연락도 오는데 한번도 맘 편히 나가서 놀아본 적이 없어요.”
출제 오류 논란을 빚은 2022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과학탐구 생명과학Ⅱ 20번 문항의 정답 결정 취소 청구 소송을 제기한 응시자 김한준(20)군은 11일 기자와의 통화에서 수능시험이 있었던 지난달 18일 이후 매일이 “너무 힘든 시간이었다”고 말했다. 김군은 통화에서 “20번 문항은 킬러 문항(초고난도 문항) 중에서도 쉬운 편이라 보통 5∼6분만에 풀리게 돼 있는데 10분 정도 시간을 써 결국 찍었다”며 “이 영향으로 다른 문제도 제대로 풀지 못했다”고 털어놨다. 서울대 화학생물공학부를 목표로 재수한 김군은 목표를 포기해야 할지도 모르는 상황에 처했다. 김군은 “20번을 맞힌 친구들도 문제를 확실히 푼 게 아니라 자기가 판단할 수 있는 선택지만 보고 찍었다고 한다. 그런데도 문제가 없다는 평가원의 논리에 법정에서 앞으로 뛰쳐나가 따지고 싶었다”고 말했다.
김군이 참석한 정답 결정 취소 청구 소송의 변론기일은 10일 오후 서울행정법원 행정6부(재판장 이주영)에서 열렸다. 이날 재판부는 “최종 판결을 17일 오후 1시 30분에 선고하겠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교육부는 오는 16일로 예정됐던 대학 수시모집 합격자 발표를 18일로 이틀 늦췄다. 수시모집 최초합격자 등록기간도 17∼20일에서 18∼21일로 순연된다. 이날 재판에는 초유의 수능 정답 유예 사태가 빚은 혼란을 보여주듯 소송 당사자 20여명 뿐 아니라 학부모와 교육부·대학 입학처 관계자, 생명과학Ⅱ 응시 수험생 등 수십 명이 모여 방청을 요구했다.
◆ 평가원 “정답 선택하는 데 지장 없어” vs 수험생 “아예 답을 찾을 수 없는 문제”
피고인 한국교육과정평가원 측은 일반적인 풀이 과정에 따르면 정답을 고르는 데 문제가 없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평가원 측은 “수험생들은 음수값이 존재해 문항 성립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나 이미 그 전에 정답 선택이 가능한 문제”라고 주장했다. 이어 “불완전성이 있다는 이유로 모두 정답 처리 해야한다는 것은 지나친 논리적 비약”이라고 했다.
반면 수험생 측 변호인은 “해당 문항은 아예 답을 고를 수 없도록 만들어진 문제”라고 반박했다. 변호인은 “평가원은 4번째 조건이 없어도 정답 선택할 수 있다고 주장하나 그 조건을 제거하면 이 문제를 틀린 학생은 여기 없다”며 “정답을 유보한 상태에서 4번째 조건을 고려하니 음수인 개체수가 나와서 문제를 못 풀게 됐던 것”이라고 했다.
논란의 20번 문항은 동물 종 P의 두 집단에 대한 유전적 특성을 분석해 멘델 집단을 가려내는 문제다. 제시문에서는 집단Ⅰ과 Ⅱ중 한 집단만 하디·바인베르크 평형(일정한 조건을 만족하며 생식하는 집단의 경우 대립유전자와 유전자형의 빈도가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상태)이 유지된다고 돼 있다. 그러나 수험생들은 계산 과정에서 특정 집단의 개체 수가 음수(-)가 되기 때문에 보기의 조건을 모두 만족하는 집단이 존재할 수 없다며 이의를 제기했다.
이들은 문항에 대한 전문가 자문 의견을 두고도 공방을 벌였다. 평가원 측은 “3개 학회에 자문을 의뢰했는데 2곳은 이상 없다는 의견을 냈고 유전학회는 학문적 오류는 지적했으나 평가적 관점의 타당성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었다”고 주장했다. 수험생 측은 “유전학회는 문제에 오류가 있어 정답을 고를 수 없다는 종합의견을 냈다”며 “평가원이 이에 대한 해석을 잘못하거나 왜곡한 것이 아닌지 의심스럽다”고 했다.
공방이 계속되자 재판부는 수험생들에게 직접 풀이과정을 질문하기도 했다. 재판부는 “4번째 조건이 없어지면 평가원 측의 풀이 방식이 하자가 없으나 4번째 조건을 맞춰보면 수험생들은 확신을 할 수 없는 것이냐”고 되물으며 “심도 있게 공부해서 (문제를) 풀어보겠다”고 했다.
◆응시자·학부모 “평가원 태도 실망스러워”
소송을 제기한 수험생들은 이날 재판 후 취재진과 만나 평가원 측의 권위적인 태도를 지적했다. 재판에 참석한 이모군은 “평가원이 우리의 풀이를 비상식적인 풀이라고 몰고 있다”며 “평가원을 믿고 공부한 우리만 억울하다”고 했다. 학부모 이모(49)씨도 기자에게 “평가원이 대형 로펌까지 수임했다는 얘기를 듣고 절망스러웠다. 아이들을 상대로 긴 싸움을 하려는 건 아닌지 싶어 고통스럽다”고 했다. 이씨는 “아이가 스탠퍼드 등 해외 대학 랩실에 문제 오류를 문의하는 메일을 100통 넘게 보내 최근 한 랩실에서 조건이 완벽하지 못해 답을 구하기 어렵단 회신도 받았다”는 절박한 심정도 전했다.
앞서 재판부는 해당 문항의 정답을 5번으로 결정한 평가원의 처분을 본안 소송 1심 판결 전까지 효력을 정지한 바 있다. 교육부와 평가원은 10일 생명과학Ⅱ를 공란으로 표시한 성적표를 학생들에게 배부했다. 법원 선고가 예정대로 이뤄지면 평가원은 이를 토대로 17일 오후 8시부터 온라인 발급 시스템을 통해 생명과학Ⅱ 성적을 제공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