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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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체 산업 보호 위해 공개 경쟁입찰 뛰어들었는데…결과가 공정위 제재?

재계 “전쟁터 같은 글로벌 경쟁에서 손 발 다 묶인 채 싸우라는 소린가” 불만 섞인 목소리
최태원 SK 회장. 연합뉴스

공정거래위원회가 22일 SK㈜가 특수관계인인 최태원 회장에 대해 사업기회를 제공한 행위에 대해 시정명령과 함께 과징금을 부과하기로 결정했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직접 전원회의에 참석해 SK실트론 지분 인수 과정과 배경에 대해 소명했음에도 불구하고 공정위는 SK㈜가 SK실트론의 잔여지분을 인수할 수 있었던 기회를 최 회장에게 제공했다고 본 것이다. 

 

공정위가 조사 착수 이후 3년여 만에 내리는 결론인데다, 총수의 계열사 지분 인수 관련해 사업기회 제공 여부를 따지는 첫 판단이어서 공정위 결과 발표에 비상한 관심이 쏠렸다. 전원회의에서도 양측의 법리공방이 팽팽했던데다 “무조건적 제재보다는 ‘사업기회 제공’에 대한 명확한 가이드가 먼저’라는 여론도 일었던 만큼 공정위도 조사 결과에 부담을 느낀 것으로 전해졌다.

 

그러나 공정위가 제재 결론을 내림에 따라 재계에서는 “국내 반도체 산업 보호 차원에서 이뤄진 총수의 책임경영마저 제재 대상이 됐다”며 “전쟁터 같은 글로벌 경쟁에서 손 발 다 묶인 채 싸우라는 소린가”라는 자조가 나오고 있다. 

 

실제로 글로벌 시장에서는 기업과 대주주/최고경영자의 공동투자는 드문 일이 아니다. 2016년 대만 홍하이그룹이 궈타이밍회장과 공동으로 일본 샤프를 인수할 때 일본과 대만 경쟁당국은 아무런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

 

◆공정위 스스로 ‘억지 제재’ 자인한 셈?

 

이번 SK실트론 사건의 최대 쟁점은 SK실트론 잔여지분(29.4%) 인수를 SK㈜의 사업기회로 볼 것인지 아닌지였다. 공정거래법에 따르면 ‘회사가 직접 또는 자신이 지배하고 있는 회사를 통하여 수행할 경우 상당한 이익이 될만한 사업기회를 제공하는 행위’라고만 규정돼 있다. 사업기회 유형과 제공방식에 대한 합리적이고 예측 가능한 기준이 없어 자의적으로 해석할 여지가 많은 것이다. 

 

이번 제재를 통해 공정위는 경영권 취득과 관계없는 단순한 소수지분 취득까지 사업기회로 규정하면서 “공정거래 법령에 사업기회 범위를 경영권 취득과 연관되는 것으로 국한하는 규정이 없다”는 점을 근거로 들었다. 이는 규제 범위가 얼마든지 자의적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는 ‘모호함’을 스스로 인정한 꼴이 됐다는 평가다. 

 

잔여지분 29.4%는 우리은행 등 채권단이 처분권을 갖는 보고펀드 소유 지분이었으므로 SK㈜가 해당 지분을 ‘제공’할 주체가 될 수도 없었다는 것이 SK 측 입장이다.   

 

과징금 부과 기준도 도마 위에 올랐다. ‘매출액이 없는 경우 등에는 20억원을 초과하지 아니하는 범위’를 근거로 과징금(16억원)이 부과됐으나 공정위가 주식인수를 ‘사업기회’로 인정했다면 실트론 매출액을 근거로 훨씬 더 큰 액수의 과징금이 부과됐어야 한다는 논리가 가능하다. 법조계에서 “사안 자체보다는 공정위가 사업기회 제공 관련 기준을 만드는 데 급급한 나머지 자기 모순적 판단을 내린 것 같다”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SK㈜에 실익 없는 잔여지분이 사업 기회? 

 

공정위는 SK㈜가 실트론 잔여지분을 취득할 경우 상당한 이익이 예상됐음에도 불구하고 합리적 사유없이 포기했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SK 측이 밝힌 당시 사정은 이와 사뭇 다르다. 

 

SK㈜는 2017년 실트론 지분 51%를 인수하는데 이미 연간 투자예산의 절반 가까이 소진한 상태였다. 여기에 물류센터, 모빌리티 영역의 투자까지 줄줄이 예정돼 특별결의 충족 지분만을 인수하는 것은 투자효율 극대화를 노린 합리적 경영판단이었다는 것이다.  

 

당시 글로벌 반도체 및 웨이퍼 시장 전망도 불투명해서 SK실트론 주식을 모두 인수하는 것이 오히려 경영상의 위험을 초래할 가능성이 크다는 판단을 내렸다는 것이 SK 입장이다. 

 

업계에서도 “당시 업계 전망이 장밋빛이었고, ‘지분 = 미래이익’이 명백했다면, ㈜LG, KTB, 보고펀드(우리은행 등 10개 채권단 소유)가 왜 실트론 지분 매각했는지 의문이다”라는 얘기가 나오는 이유다.  

 

◆공개입찰 참여…최태원 회장에게 밀어주기 가능한가?

 

공정위는 ‘SK㈜가 최태원 회장의 잔여주식 취득을 직간접적으로 지원해 사업기회를 제공’했다고 봤으나 SK 측은 “공개경쟁입찰을 통해 투명하고 적법하게 진행됐다”며 반박하고 있다.  

 

2017년 4월, 보고펀드 대주단은 29.4% 지분 매각을 위해 일간지 등에 공개경쟁입찰 공고를 냈다. 이 입찰에는 중국 후발 업체도 참여했으며, 채권단의 최소 매도 희망 가격(채권단 원금 수준)을 상당히 상회하는 가격을 적어내는 등 실질적 경쟁이 이뤄진 것으로 알려졌다. 해당 업체는 실트론 지분 인수를 지속 시도하며 지분 인수 의사를 분명히 밝혔다는 것이 SK 측 설명이다. 

 

업계 관계자들은 “최태원 회장을 위해 우리은행 등 채권단과 해외업체 등 13개 회사가 공모했다는 공정위의 시각은 난센스”라며 “그럴 경우 형법상 경매입찰방해, 업무방해, 업무상 배임에 달하는 엄청난 사건이 되는데 고작 잔여지분 인수에 그런 리스크를 감행하겠느냐”고 입을 모았다.

 

◆이사회 의결 꼭 필요했을까

 

공정위는 SK㈜가 실트론 잔여지분을 인수하지 않는다는 결정을 내리면서 이사회를 거치지 않은 것을 큰 절차상 문제가 있는 것처럼 주장하나 공정거래법은 이 경우에 이사회 결의를 요구하지 않고 있다. 

 

최태원 회장은 조금이라도 문제의 소지가 있다면 지분을 인수하지 않겠다는 입장이 확고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사회가 필요한지 아닌지를 SK(주) 사내외에 다각도로 확인했고, SK㈜ 법무 임원, 로펌 등은 한목소리로 이사회 상정이 불필요한 사안이라는 의견을 전달했다는 것이다.

 

SK㈜ 사외이사(4인) 전원으로 구성된 거버넌스위원회도 2차례에 걸쳐 ‘제3자가 진행하는 공개입찰 참여는 ‘SK㈜의 사업기회가 아니고, 이해관계 상충도 없다’ 등 이유로 이사회 상정 사안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렸다는 것이 SK측 입장이다.


김현주 기자 hjk@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