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워싱턴 DC 스미소니언 미국역사박물관. 2014년 ‘미국 역사를 만든 물건 101’에 링컨의 모자, 그레이엄 벨의 전화, 암스트롱의 우주복 등이 선정됐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와인도 있습니다. 샤토 몬텔레나 샤르도네(Chateau Montelena Chardoney) 1973입니다. 이 한병의 와인이 어떻게 미국의 역사를 만들었을까요.
■파리의 심판과 영화 ‘와인 미라클’
‘당신의 삶에도 찾아올 행복한 기적’. 2008년 개봉한 랜디 밀러 감독의 영화 ‘와인 미라클(원작명 보틀 쇼크· Bottle Shock)’의 포스트에 적힌 문구가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역사에 남는 최고의 와인을 빚겠다는 일념으로 파산 직전의 와이너리 샤토 몬텔레나를 힘겹게 끌고 가는 짐 배럿. 철부지 외아들 보 배럿은 이런 아버지가 못마땅해 사사건건 부딪히죠. 1976년 프랑스 파리에서 온 한 남자가 프랑스 와인과 미국 와인이 경합하는 이벤트에 참여해달라고 제안합니다. 이에 아들 보는 샤르도네 1973 빈티지를 들고 파리로 떠납니다. 하지만, 그 사이 온 정성을 기울여 양조한 샤르도네 와인이 모두 갈색(보틀 쇼크)으로 변해버립니다. 절망한 짐은 모든 와인을 헐값에 처분하고 와이너리를 닫게 되죠.
절벽 끝에 선 절체절명의 순간, 파리에서 뜻밖에 낭보가 날아 옵니다. 자신이 빚은 와인이 프랑스의 유명한 와인을 모두 제치고 1등을 했다는 소식. 우여곡절 끝에 짐 배럿은 처분했던 와인을 되찾고 샤토 몬텔레나 샤르도네가 세계 최고 와인이라는 명성을 얻게 된다는 스토리입니다. 1976년 세계 와인업계를 떠들썩하게 만든 사건 ‘파리의 심판’을 담은 영화로 와인의 변방이던 미국 캘리포니아 와인이 어떻게 세계 무대에 성공적으로 데뷔했는지를 그립니다. 하지만 영화가 끝날때까지 정작 가장 중요한 인물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바로 샤토 몬텔레나 샤르도네 1973 빈티지를 만든 주역으로 지금은 ‘샤르도네의 제왕’으로 불리는 와인메이커 미엔코 마이크 그르기치(Miljenko Mike Grgich)입니다. 그가 없었다면 파리의 심판도 없었겠지만 영화에서는 그가 전혀 조명되지 않았죠.
■미국 와인의 기적, ‘파리의 심판’
와인을 많이 접해 보지 못했더라도 ‘파리의 심판’을 한번쯤은 들어 봤을 겁니다. 1976년 5월 24일. 프랑스 파리 인터콘티넨탈 호텔에서 난다긴다하는 유명한 프랑스 와인과 당시 거의 알려지지 않은 캘리포니아 와인을 블라인드 테이스팅으로 점수를 매기는 이벤트가 열립니다. 파리에서 와인샵과 6주동안 와인교육을 하는 ‘아카데미 뒤 뱅’을 운영하던 영국인 스티븐 스퍼리어(Steven Spurrier)와 미국인 동료 패트리샤 갤러거(Patricia Gallagher)의 아이디어입니다. 그들은 캘리포니아 와인들을 자주 테이스팅하면서 미국 와인이 점점 발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미국 독립 200주년을 맞아 의미있는 행사를 열자고 의기투합합니다. 물론 와인샵과 와인스쿨을 홍보하려는 의도도 컸습니다.
레드와 화이트 와인 모두 캘리포니아 와인 6종과 프랑스 와인 4종씩 테이블에 오릅니다. 심사위원들은 프랑스 최고의 와인 전문가 9명으로 도멘 드 라 로마네 꽁띠와 샤또 지스쿠르의 소유주, 미슐랭 3스타 레스토랑의 오너 셰프와 수석 소믈리에, 프랑스 최고 와인전문지의 편집장 등입니다. 결과는 어떻게 됐을까요. 놀랍게도 화이트 1위는 샤토 몬텔레나 샤르도네 1973, 레드 1위는 스택스립 와인셀라스(Stag's Leap Wine Cellars) S.L.V 카베르네 소비뇽 1973으로 모두 미국 와인이 차지합니다. 특히 캘리포니아 와인이 라모네-푸르동(Ramonet-Prudhon) 바타르 몽라셰, 도멘 르플레브(Domaine Leflaive) 퓔리니 몽라셰 레 퓌셀 등 쟁쟁한 부르고뉴 마을단위 와인들을 제치고 화이트 1, 3, 4위를 차지하자 심사위원들은 경악합니다.
스택스립도 그랑크뤼 1등급 샤토 무통 로칠드와 샤토 오브리옹 등을 물리쳤기에 충격은 더욱 컸지요. 이 결과는 당시 기자로서는 유일하게 현장에서 취재하던 타임(TIME)지 특파원 조지 M. 테이버 덕분에 그해 6월 7일자 타임지에 ‘파리의 심판(Judgement of Paris)’이라는 제목으로 실리게 됩니다. 기사는 “깜짝 놀랄 일이 일어났다. 캘리포니아가 골(Gaul 프랑스의 옛 이름)을 이겼다”고 전합니다. 프랑스 와인업계는 충격적인 패배를 인정할 수 없어서 10주년인 1986년과 30주년인 2006년 같은 와인으로 재대결을 벌였지만 역시 미국의 승리로 돌아가 파리의 심판이 우연이 아니었음을 입증합니다.
■가난한 시골마을 양치기 소년, ‘샤르도네의 제왕’ 되다
최근 발간된 <‘파리의 심판’과 미국 와인 이야기 기적의 와인(출판사 가산북스, 박원숙 역)>은 영화에서는 전혀 등장하지 않았던 그르기치의 파란만장한 일생을 담은 자서전입니다. 이탈리아와 아드리아해를 마주보고 있는 크로아티아는 오스트리 헝가리 제국의 지배를 받다가 1차 세계 대전후 독립했지만 유고슬라비아 왕국의 일부가 됩니다. 2차세계대전이후에는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의 일원이 됐고 1991년 6월에야 내전을 거쳐 분리 독립된 나라입니다. 책은 크로아티아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양치기 소년이 빨치산으로 몰려 옥고를 치르다 가까스로 공산정권 유고를 탈출해 미국 나파밸리에 정착, ‘샤르도네의 제왕’에 오르기까지의 인생 역정을 현대사와 미국 와인 역사를 섞으며 드라마틱하게 펼쳐내 마치 한편의 영화를 보는 듯 하네요.
크로아티아 인구 1000명의 작은 데스네 마을에서 11남매의 막내로 태어나 평화로운 바비나 고밀라 산 언덕에서 양을 치던 소년. 그의 이야기는 1954년 여름, 신발 밑창에 32달러를 숨겨 공산치하의 유고연방을 탈출하는 기차에 몸을 싣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어린시절은 신발 한 켤레도 사지 못할 정도로 가난했지만 와인을 만들고 가축을 돌보며 마냥 행복했죠. 하지만 2차 세계대전으로 이탈리아와 나치가 마을을 점령하고 전쟁이 끝난 뒤에는 공산당 치하로 바뀌면서 청년시절은 지옥으로 변하고 맙니다. 크로아티아 자그레브 대학 포도재배 양조학과를 다니던 그는 유엔 교환 학생 프로그램에 참석해 독일의 와이너리에서 포도 수확을 돕는 일을 한다며 여권을 발급받아 유고 탈출을 감행합니다. 하지만 그의 진짜 목적지는 미국 캘리포니아 나파밸리. 내 땅이라 부를 수 있는 한 조각 땅을 마련해 와인을 만들어 보고 싶은 꿈을 이루기 위해서였죠.
그르기치는 독일과 캐나다를 거쳐 크로아티아를 떠난 지 4년만인 1958년 리 스튜어트가 운영하는 나파밸리 와이너리 수버랭(Souverain)에서 3개월 동안 포도수확을 돕는 일꾼으로 채용돼 꿈에 그리던 미국땅을 밟게됩니다. 하지만 그때는 전혀 몰랐죠. 유고를 탈출할 때 들고 왔던 골판지 가방과 와인 양조 책, 쓰던 베레모까지 워싱턴 DC 스미소니언 박물관에 전시될 정도로 미국의 가장 위대한 와인메이커가 될 줄은.
■리 스튜어트, 앙드레 첼리스체프 그리고 로버트 몬다비
그르기치는 자서전에서 자신의 와인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세명의 인물을 소개합니다. 첫 번째가 리 스튜어트입니다. 그르기치는 나파밸리 동쪽 하웰 마운틴의 수버랭에서 3개월이라는 짧은 기간을 보내지만 리 스튜어트에게서 많은 것을 배웁니다. 보리우 빈야드에서 당시 미국 최고의 카베르네 소비뇽을 만들던 와인메이커 앙드레 첼리스체프에게서 양조를 배웠기 때문입니다. 그는 나중에 ‘현대 미국 와인 양조의 대부’로 불리게 됩니다. 그르기치는 “리 스튜어트는 나파밸리 와인 초기의 뛰어난 개혁자이며 와인 명예의 전당에 포함시켜 존경받아야 할 인물”이라고 회상합니다.
그르기치는 당시 나파밸리에서 가장 큰 와이너리이던 크리스천 브라더스에서 스파클링 와인을 맡아 병입, 선적 등 업무를 익힌 뒤 앙드레 첼리스체프를 찾아가 9년동안 본격적인 양조 수업을 받고 결혼까지 합니다. 책은 그르기치의 자서전이지만 미국 와인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앙드레와 그르기치는 최초로 산업적인 대규모 젖산 발효에 성공합니다. 마이크로필터를 사용한 이중 여과장치로 박테리아와 효모를 제거한 뒤 병입해 와인의 유통기간을 늘리고 품질을 획기적으로 개선합니다. 그르기치는 이를 ‘기적적인 사건’이라고 적습니다.
그르기치는 1968년 나파밸리에 설립된 최초의 대형 와이너리 로버트 몬다비(Robert Mondavi)를 만나 4년동안 와인메이커로 활동하면서 엄청난 업적을 일굽니다. 그가 몬다비에서 처음 만든 카베르네 소비뇽 1969 빈티지는 1972년 LA타임즈 주최로 열린 캘리포니아 사상 첫 블라인드 테이스팅 대회에서 1등을 차지하고 와인스펙테이터도 99점을 부여합니다.
■샤토 몬텔레나 샤도네이 탄생 비화
그의 스토리는 다시 샤토 몬텔레나로 돌아갑니다. 몬다비에서의 성공으로 유명해진 그르기치는 1972년 샤토 몬텔레나 와인메이커로 자리를 옮깁니다. 이곳에서 샤토 몬텔레나의 공동 소유주중 한명이던 짐 배럿과 운명적으로 만납니다. 짐 배럿은 급여외에 매년 1%의 샤토 몬텔레나 소유권을 주겠다고 제안해 그르기치를 모셔옵니다. 1882년에 지어졌지만 금주시기에 문을 닫으면서 50년동안 방치돼 폐허로 변해 버린 와이너리. 이에 그르기치는 모든 장비를 하나하나 갖춰가며 와인을 빚기 시작합니다. 샤토 몬텔레나 샤르도네 탄생 비화가 있네요. 짐 배럿은 프랑스 보르도 그랑크뤼 1등급 5대 샤토중 하나인 샤토 라피트 로칠드 같은 위대한 카베르네 소비뇽 와인만 만들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시장에 내놓을려면 최소 5년의 숙성이 필요했고 5년간 수입이 전혀 없다면 파산할 수밖에 없었죠. 이에 그르기치가 숙성기간이 짧은 화이트 와인을 만들자고 제안했고 그렇게 샤토 몬텔레나 샤르도네가 탄생합니다.
영화 속 ‘보틀 쇼크’는 실제 있었던 일화입니다. 병속의 산소를 빼내고 코르크를 밀어넣는 진공 코르크 장비를 구입하지 못했기 때문이죠. 이에 샤르도네 첫 빈티지인 1972는 그냥 코르크로 막아 병입 했는데 한달뒤 갈색을 띈 핑크색으로 변해 버립니다. 몇 달이 지나도 색이 바뀌지 않아 절망이 극에 달했을 때쯤 서서히 황금색으로 돌아왔고 맛도 아주 훌륭하게 바뀌었다고 그르기치는 전합니다. 보틀 쇼크는 와인 양조 용어로 화이트 와인이 병입 직후나 이동으로 색깔이 일시적으로 변하는 현상입니다. 발효후 공기 접촉으로 나타나며 맛과 향에는 영향이 없고 시간이 지나면 정상으로 돌아온다고 하네요.
1976년 파리의 심판으로 그르기치는 이제 위대한 와인메이커의 반열에 오릅니다. 그의 나이 53살때입니다. 그는 파리의 심판에서 1위를 차지할 수 있었던 비결로 샤르도네를 섭씨 7~10도에서 저온 발효해 자연적인 아로마를 잘 보존 시킨 점을 꼽는 군요. 또 프랑스 부르고뉴 샤르도네에서 나는 젖산 냄새를 싫어해 포도의 사과산을 젖산으로 바꾸는 말로라틱 과정을 생략합니다. 사과산이 그대로 남아 신선한 맛과 깔끔한 산도가 돋보였고 음식과 잘 어울리는 샤르도네가 탄생했다고 하네요. 또 800 상자만 만들어 1년 동안 사용한 프랑스 오크통에서 8개월 숙성해 탄닌이 더 부드럽고 우아하며 섬세했다고 회고합니다. 그는 샤토 몬텔레나 샤르도네 첫 빈티지 1972를 90살 생일이던 2013년 4월 1일 오픈했는데 41년동안 놀랄만한 신선도와 깊이가 유지됐다고 하니 정말 대단한 와인입니다.
■꿈에 그리던 나의 와이너리 그르기치 힐스
그르기치는 크로아티아를 떠나온지 23년만인 1977년 샤토 몬텔레나를 떠나 러더퍼드에 20에이커를 사들여 꿈에 그리던 자신의 와이너리를 세웁니다. ‘힐스 셀러스’라는 와인을 만들던 오스틴 힐스(Austin Hills)와 공동 투자해 만든 그르치기 힐스(Grgich Hills)로 두 사람의 성을 넣어 와이너리 이름을 완성합니다. 레이블에는 그르기치의 상징과도 같은 샤르도네 포도송이를 그려 넣습니다. 또 오스틴 힐스는 영국 가족들의 상징인 말을 선택하고 그르기치는 코로아티아 문장인 빨강과 흰색 체크 보드를 새겨 고향 크로아티아를 기립니다. 기공식은 미국 독립기념일인 7월 4일. 미국이 나에게 베풀어 준 기회에 감사하고 내 와이너리를 갖는 평생 꿈을 이뤄 자유를 얻게 됐다는 의미에서 7월 4일을 선택했다는 군요.
그의 명성은 계속 이어집니다. 1980년 시카고 트리뷴이 전 세계 샤르도네 와인 221개가 출품된 단일 품종 세계 최대 규모의 샤르도네 테이스팅 행사를 개최했는데 역시 프랑스 부르고뉴 와인은 물론, 미국의 모든 와인들을 제치고 1위를 차지합니다. 1981년 백악관에 열린 스페인 후안 카를로스 국왕 만찬에는 그르기치 힐스 샤르도네 1979이 올랐고 1982년 레이건 대통령은 파리의 미국 대사관에서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을 초청해 만찬을 열면서 프랑스 와인이 아닌 그르기치 힐스 샤르도네 1979를 내놓아 프랑스 와인업계를 깜짝 놀라게 만듭니다. 또 1983년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캘리포니아 방문때 스탠포드 대학 총장이던 도널드 케네디가 만찬에 그르기치 힐스 샤르도네 1978 빈티지를 식탁에 올렸습니다. 이처럼 그르기치 와인이 유명해지면서 그는 ‘샤르도네의 제왕’이라 별명을 얻게 됩니다.
그르기치는 유기농과 바이오다니믹 인증을 받아 2006년부터는 제초제 및 화학 비료를 전혀 사용하지 않고 있으며 2007년부터 자가 포도밭의 포도로만 와인을 빚고 있습니다. 포도밭 5곳은 나파밸리에서 가장 덥고 큰 일교차로 강건한 와인이 생산되는 최북단 칼리스토가에서 산 파블로 만의 영향으로 가장 서늘한 아메리칸 캐년까지 다양한 기후대에 걸쳐 있습니다. 덕분에 복합적인 풍미가 와인에 가득 담깁니다. 대표 와인 샤르도네는 젖산발효를 하지 않아 신선한 산도와 섬세한 꽃향기, 풍부하고 복합적인 과실 풍미가 밀도 있게 표현됩니다. 또 소비뇽블랑, 카베르네 소비뇽, 메를로 와인과 크로아티아가 고향으로 밝혀진 레드품종 진판델(프리미티보) 와인도 빚고 있습니다. 현재 그르기치 힐스와 샤토 몬텔레나는 나라셀라에서 수입합니다.
그르기치는 1993년 고향 크로아티아로 돌아가 아드리아해의 푸른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와이너리 그르기치 비나(Grgich Vina)를 세우고 1996년 토착품종으로 빚은 포십과 플라바츠말리를 선보입니다. 이처럼 와인업계에 미친 엄청난 업적을 인정받아 그는 2008년 미국의 명문 요리학교 CIA(Culinary Institute of America)가 선정하는 ‘양조가 명예의 전당(Vintners Hall of Fame)’에 이름을 올립니다.
1923년생인 그르기치는 2022년 99살됐습니다. 그는 지금도 딸 바이올렛과 조카 이보 예라미즈와 함께 와이너리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좋지 않은 포도로 적당한 와인은 만들 수 있다. 그러나 나의 목표는 늘 최고 품질의 와인을 만드는 것이었다”. 이처럼 그는 평생을 ‘최고의 와인은 최고의 포도에서부터 시작한다’고 믿고 포도밭을 아기처럼 돌보며 지냈다고 합니다. 하지만 “포도나무는 우리와 함께 대자연이 키운다고 진정 말하고 싶다. 대지의 어머니는 해마다 농부에게 놀라운 선물을 안겨 준다. 나는 어릴 때부터 대자연이 주는 선물인 햇빛, 비, 안개, 파도 등을 무한히 존경하는 법을 배웠다. 마지막 결정은 늘 대지의 어머니가 내린다”고 늘 믿는답니다.
서문에 적힌 그의 말 한마디가 가슴을 파고 듭니다. “나는 옛날 고향의 바비나 고밀라 산을 올랐던 만큼 세이트헬레나 산을 수없이 올랐다. 산을 어떻게 오르느냐고 물으면 한 번에 한 걸음씩 오르면 된다고 말하고 싶다. 중간에 되돌아올 때도 있지만, 다시 돌아가 정상에 도달할 때까지 계속하여 오른다. 기적은 오직 신만이 만들 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매일 배우고 또 배운 것을 기억하며, 꿈을 향해 한 발자국씩 나아가면, 우리도 기적을 만드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
■역자 소개
역자 박원숙 교수는 이화여자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고 런던대학교에서 <서구 모더니즘이 한국 현대시에 미친 영향>으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성균관대학교, 고려대학교 등에서 강의했으며 서울 와인스쿨에서 소믈리에, 와인 마스터, 양조학 과정을 수료했다. 옮긴 책으로는 <와인 101, 와인의 기본>, <아시아인의 와인 마스터>, <아시아의 맛, 음식과 와인>, <산 로렌조의 포도와 위대한와인의 탄생>, <보르도 전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