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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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환기칼럼] 국민 ‘돈 살포’ 중독 조장하는 與 후보

연일 ‘매표 포퓰리즘’ 공약 제시
탈모약·모발이식 건보 적용도
재정파탄 국가 사례 안 보이나
미래 세대에 죄는 짓지 말아야

후안 페론 아르헨티나 대통령이 1952년 이바네스 델 캄포 칠레 대통령 당선자에게 편지를 보낸다. “국민, 특히 근로자에게 모든 것을 주십시오. 이미 많은 것을 주었어도 더 주십시오. 곧 그 결실을 보게 될 것입니다. 경제 붕괴는 거짓말입니다. 경제보다 신축성이 좋은 것도 없습니다.” 페론의 정치 철학이 응축돼 있다.

그가 왜 복지와 돈을 퍼주는 포퓰리즘(대중영합주의)의 원조로 불리는지 알게 한다. 편지에서 결실이라는 표현을 주목해야 한다. 페론의 포퓰리즘 정치(페로니즘)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결실은 지지율 상승과 선거 승리를 뜻한다. 3선에 성공한 그는 1946년부터 총 11년간 대통령직을 수행했으니 정치적으로는 남는 장사를 했다.

김환기 논설실장

하지만 그의 포퓰리즘 정치는 조국을 ‘지옥문’으로 밀어 넣었다. 무상 의료· 주택· 교육, 저소득층 임금 20% 인상 등 친노동·반시장 정책은 기업 경쟁력 약화와 재정 파탄으로 이어졌다. 그는 ‘경제 붕괴는 거짓말’이라고 확신했지만 현실은 정반대로 나타난 것이다.

1940년 세계 4위 경제대국이었던 아르헨티나는 10년 만에 후진국으로 전락했다. 포퓰리즘 정치의 끝은 국가경제 붕괴라는 묵직한 교훈을 준다. 우리나라가 결코 따라가서는 안 되는 길이다. 페론과 아르헨티나의 흑역사를 소환한 것은 우리 상황이 답답해서다. 지지율 1위를 달리는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의 돈 살포 공약이 도를 넘었다.

이 후보는 연일 돈을 주고 세금을 깎아주겠다는 공약을 한다. 자영업자 코로나19 피해 완전 보상, 18세까지 아동수당 확대, 전국민 연 100만원, 청년 200만원 기본소득, 1주택자 보유세와 종부세, 양도세 감면 등을 약속했다. 득표에 도움이 된다면 뭐든지 내놓을 태세다. 표와 재정을 연결하는 능력이 정말 탁월하다.

심지어 탈모약과 가발, 모발이식의 건강보험 적용까지 해주겠단다. 국가재정을 쌈짓돈으로 여기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이다. “나는 포퓰리스트가 맞다”며 대놓고 돈 살포 약속을 하니 대통령이 되면 얼마나 더할지 걱정이 앞선다. 오죽하면 “이 후보의 선거운동은 포퓰리즘의 융단폭격”이라는 지적이 나오겠나. 선거문화가 1950∼60년대의 ‘막걸리·고무신 선거’ 시절로 퇴행된 느낌이다.

국가재정은 화수분이 아니다. 올해 국가채무는 1064조원을 넘고 국내총생산(GDP) 대비 비율도 50%로 급등한다. 그런데도 이 후보는 공약 재원을 어떻게 마련할지에는 관심이 없다. 증세가 답인데 표에 도움이 안 되니 아예 선택지에서 제외한다. 증세 없는 복지는 허구라는 걸 모른단 말인가. 나랏돈은 적재적소에 투입돼야 한다. 이 후보의 공약들은 이런 원칙에서 벗어난다. 탈모약과 모발이식 수술의 건보 적용부터가 그렇다. 이 후보는 “신체의 완전성이란 측면에서 건보 대상이 돼야 한다”고 하지만 견강부회다. 그의 말대로라면 모든 외과적 수술이 건보 대상이 돼야 한다. 일반적 탈모 치료에 공공보험을 적용하는 나라는 거의 없다.

문제는 강력한 포퓰리즘 지도자가 출현하면 국민의 포퓰리즘 중독이 깊어진다는 점이다. 포퓰리즘의 단맛을 본 국민들이 스스로 그것을 끊는 것은 불가능하다. 정치인들의 유혹은 국민의 기대와 요구 수위를 한껏 높인다. 나중에는 돈과 복지를 받는 것을 당연한 권리로 착각하게 된다. 정권이념 성향에 관계없이 포퓰리즘 바퀴가 계속 굴러갈 수밖에 없다. 망국의 지름길이다. 국민의 생각을 조사해서 인기를 끄는 일을 하는 게 정치인의 과제가 아니다. 정치인의 과제란 옳은 일을 해서 지지를 받는 것이다.

이 후보는 신년회견에서 “국력 세계 5위, 국민소득 5만달러를 향해 나아가겠다”며 경제대통령이 되겠다고 역설했다. 허나 포퓰리즘 지도자가 국운을 일으켜 세운 전례가 없어 공허하게 들린다. 신뢰를 얻으려면 포퓰리즘 공약부터 걷어내야 할 것이다. 나랏빚을 갚아야 할 미래세대의 부담을 생각해서라도 자제해야 옳다. 미국의 정치개혁가 제임스 프리먼 클라크는 “정치꾼은 다음 선거를 생각하고, 정치가는 다음 세대를 생각한다”고 했다. 이 후보가 곱씹어봐야 할 명언이다.


김환기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