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티는 지난해 3월, 최초로 NFT 예술 작품을 경매에 올렸던 곳이다. 6900만달러, 약 780억원에 낙찰돼 세계적인 화제가 됐던 비플의 ‘매일: 첫 5000일(Everydays: The First 5000 Days)’ 경매다. 그는 고무된 어조로 “크리스티가 NFT 예술 시장을 리드했다”며 “NFT는 미술 시장의 신대륙을 발견한 것”이라고 말했다.
◆NFT 실적에 고무된 크리스티
국내외 미술계에서 NFT가 한층 자리를 잡아가는 모습이다. 글로벌 경매사에서 ‘NFT 예술’이 하나의 카테고리로 자리를 굳혔고, 국내에서도 예술적 안목과 전문성을 가진 주요 화랑들 사이에서 본격적으로 NFT 작품이 시도되고 있다.
크리스티에 따르면, NFT 경매가 시작된 지난해 NFT 경매는 총 100건이 넘었으며, 판매 총액으로는 1억5000만달러(약 1800억원)에 달한 것으로 나타났다. 불과 1년 만에 미술시장에 NFT가 자리매김했다는 설명이다.
크리스티 측은 “구매자 가운데 75%가 신규고객이었고, 대부분 디지털세계에서 온 젊은 컬렉터, 밀레니얼 세대였다”며 “재미있는 수치는 비플의 ‘매일’ 경매 당시 응찰자 34명이 100만달러 이상을 불렀고, 그 가운데 29명은 신규고객이었으며, 25명은 35세 이하였다는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또 하나 흥미로운 점은 최근 몇 달간(으로 좁혀보면) NFT 컬렉터 커뮤니티는 전통적인 컬렉터들보다 확장됐는데, 디지털 예술과 기존 오프라인상의 예술, 두 부문의 앞서가는 참여자들은 서로 점점 더 겹쳐지고 있다”고 말했다. 비플의 작품 경매에 참여한 응찰자가 이후에 전통적인 미술 작품 경매인 피카소 작품 경매에 참여했고, 전통적인 경매 참여자가 점차 NFT 예술작품 경매에 참여했다는 것이다.
크리스티 측은 “지난해 초반에는 NFT 응찰자들이 디지털 네이티브들이자 신규고객들이었다면, 점점 시간이 흐르면서 기존 고객들이 NFT 기술에 친숙해졌고, 두 세계 간 갭이 줄어드는 것을 확인했다”고 설명했다. 세루티는 “앞으로 우리는 투자와 혁신을 계속해나갈 것이며, 질에 더 집중할 것”이라고 밝혔다.
◆국내 미술계에서도 ‘NFT예술’ 활발할 듯
국내 미술계에서도 NFT 예술 시장은 더 확대될 전망이다. 지난해에는 작가와 저작권자의 동의 없이 NFT화가 발표되거나, 검증 역량이 되지 않는 사업체가 위작 의혹 작품으로 NFT화를 발표해 논란이 이는 등, NFT 예술과 관련한 사건·사고로 잡음이 끊이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혼탁한 시장 상황을 관망하던 주요 화랑들이 최근 작가들과 NFT 예술 작품을 시도하기 시작하면서 올해는 조금 더 질서 있는 시장을 형성해나갈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삼청동 화랑가의 주요 갤러리 중 하나인 학고재는 작가들에게 NFT프로젝트를 제안해, 지난해 11월 카카오의 NFT플랫폼 ‘클립 드롭스’를 통해 첫 작품을 선보였고, 이후 꾸준히 NFT 작품을 시도하고 있다.
학고재 우정우 실장은 “새로운 시도나 방법을 찾으려 계속 연구하고 논의 중”이라며 “이미 결과물이 나온 작가도 있고, 아이디어를 논의 중인 작가도 있다”고 말했다. 학고재는 클립 드롭스를 통해 최근 이우성, 김재용, 김현식 등 6명 작가의 NFT 작품을 소개했다. 밀레니얼 세대 컬렉터들에게 인기가 있는 유명 작가들이다.
우 실장은 “초기엔 NFT 아트 시장에서 고를 수 있는 작품의 폭이 좁고, NFT 예술 작품 소장에 관심이 있는 사람보다 작품 수가 훨씬 적었기 때문에 시장의 반응이 뜨거웠던 측면이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관심 있는 컬렉터가 늘어나는 것보다 쏟아져 나오는 작품 수가 더 늘어나면서 구매자들의 눈도 높아지고 구매에도 신중해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고 말했다.
화랑가에서는 NFT 작품 전용 갤러리 공간을 따로 마련해 전문성을 부각하려는 시도도 나오고 있다. 서울 종로구 평창동에 전통적인 작품 전시장을 갖춘 스페이스미음은 오는 3월쯤 서울 용산구 한남동에 NFT 예술 작품 전용 쇼룸을 열어 NFT 작품을 선보이겠다는 계획이다.
◆어떤 게 ‘NFT 예술’일까?
광범위한 NFT의 세계에서 어디까지를 ‘NFT 예술’이라 할 수 있을지, 어떤 게 예술성이 담보된 ‘NFT 예술’인지는 여전히 모호하다. 정답이 있을지도 의문이다. 오프라인 현실에서 인정받는 거장의 작품이 NFT 세계에서도 최고의 예술품으로 대우받을지, 아니면 새로운 작가군이 우위를 점할지도 속단하기 이르다. 전문가들은 NFT 예술 분야가 생긴 초기인 만큼, 아직은 시간이 필요하단 의견이 많다.
크리스티 측은 “NFT의 세계는 그것을 기반하는 통화의 변동성만큼이나 자주 변동되기 때문에, 엄격한 기준을 제공하는 것은 디지털 아트의 잠재적 발전 가능성과 미래성에 이르는 길을 너무 빨리 폐쇄하는 것일 수 있다”고 했다. 독일 미디어아트 전문 미술기관 ZKM의 큐레이터는 최근 한국 방문차 가진 기자간담회에서 “모든 기술은 처음에 만들어진 이후에는 우선 사람들이 그 기술을 가지고 마음껏 다양한 실험이나 노는 작업들을 하도록 둬야 한다”고 했다.
다만 시장이 안착되면서 조금씩 힌트가 보인다. 크리스티는 어떤 것을 NFT예술이라고 할 수 있다고 보는지 질문에 “NFT를 판매할 때, 다음 사항들을 고려하는 편”이라며 다섯 가지 기준을 내놨다.
해당 NFT 작품이 △최고 수준인지, 감성적 진정성이 있는지, 시장을 선도할 잠재력이 있는지 △주제상 연결된 작품을 크리스티에서 다루는지 △작가에 대한 기존 시장 또는 수요의 폭발적 증가가 있는지 △크리스티가 작가와 관계가 있는지 △NFT의 레퍼런스가 디지털 네이티브적인지다.
작가 출신 갤러리스트인 스페이스미음의 배다리 대표는 “초기에 예술인보다 기술인이 주도하는 과정에서 NFT 작품의 콘텐츠나 가치를 고려하는 것이 등한시된 측면이 있다”며 “가령 기존 존재하는 원화 작품을 그대로 활용해 움직임만 넣는 단순한 방식의 NFT는 예술 작품이 되기는 어렵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배 대표는 “가장 중요한 것은 작가가 직접 작업하는 것”이라며 “기술자가 제안하는 방식이 아니라, 작가가 그 방식과 매체를 이해하고 직접 기획하고 거기에 필요한 기술만 제공을 받는지가 제대로 된 NFT 예술작품이라고 할 기준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예술 작품이라면 그 작품의 레퍼런스가 필요한데 어떤 내용으로, 어떤 기획방향과 과정을 거친 것인지 전혀 소개되지 않은 채 선보이고 있는 것도 많다”고 지적했다. 이어 “원화 작품을 대할 때 어떤 배경에서 어떤 작품을 한 것인지 관람객이 수많은 것을 검토하듯이, 왜 이런 작업을 했는지를 보여주는 레퍼런스는 예술 작품으로서는 꼭 필요한 부분인 만큼, 이런 요소들이 갖춰져야 가상세계 또는 디지털 세계에서도 작품다운 작품으로 구별될 것”이라고 말했다.